군대 선임 A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날 A 선임은 야간 근무를 위해 산꼭대기 초소로 이동 중이었습니다. 꽤나 험한 산이고 초소까지 가는 산길은 외길이라 밤에는 제법 으스스한 분위기입니다. 거기에 올라가다 보면 초입쯤에 이제 사용하지 않는 버려진 초소가 하나 더 있어서 괜히 더 무서운 분위기를 만듭니다. 6.25 때 쓰는 초소라는 소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폐가와 다르지 않은 곳입니다. 그날도 묘하게 꺼림칙한 분위기에 A 선임은 서둘러 산길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원래대로라면 A 선임은 산 위 초소에 가서 B 선임과 교대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B 선임은 내려가서 복귀를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초입에 있는 버려진 초소에서 B 선임이 부르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야, A!" "일병 A!" ..
1. 우리 기획사는 장애인 역할에는 역시 장애인 배우를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유능한 배우들이 그 역할을 원한다면 언제든 캐스팅할 수 있도록 '사고'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2. 할아버지 옥수수밭에 있는 허수아비는 때로 너무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허수아비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와 똑같은 흉터를 발견했을 때는 뭔가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3. 평소 폐소공포증 때문에 방문을 열고 잡니다. 문제는 자는 동안 그게 닫혔다는 겁니다. 4. 어린 소녀가 "정말 들어오시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라고 말했다. 방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 바닥에 쓰러진 그녀의 시체를 보기 전까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5. 마을에 뿌려진 실종자 포스터에 내 얼굴이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 목격일'에 내일 날짜가..
나는 겉도는 아이다. 반 친구들과 잘 섞이지 못하고, 내가 피하든 상대가 피하든 혼자일 때가 많은 아이다. 아마 내가 피하는 것보다는 다른 애들이 피할 때가 많을 거다. 초등학생이라도 그 정도는 안다. 나는 섞이기 힘든 아이고, 저 친구들은 내가 잘 모르는 아이들이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 힘든 아이들. 그래서 조금 무서운 것도 같다. 어느 날 한 아이의 집에서 큰 파티를 연다고 한다. 왜 거기에 끼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가지 않을 이유도 딱히 없어서......가 이유라면 이유겠지. 장소는 큰 강당 같은 파티장. 넓고 큰 강당에 넓고 큰 장식과 넓고 큰 테이블...... 너무 크게 느껴지는 그것들은 마치 하나의 미로 같아 보였다. 그래서 이 파티장은 초등학생들이 놀..
1. 아이가 "기부"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돈을 꺼내 노숙자에게 주었고, "위생"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그 노숙자를 목욕시켜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이어서 "살인"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2. 룸메이트가 우리 가족을 죽이려고 했어요! 그래서 그를 거미줄로 감싸고 그 몸 안에 알을 낳기로 했어요. 3. 헌혈을 하면서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병에 걸릴 겁니다. 4. 항상 조수석에 앉아 잠이 드는 남자친구를 보며 미소 지었다. 나는 그의 안전벨트를 풀고, 콘크리트 벽을 향해 가속했다. 5. 350도로 예열하고, 30분 동안 굽습니다. 과정이 귀찮다면 그냥 입양 보내도 됩니다.
1. 나는 아내가 재빨리 라디오를 끄는 것을 보면 의아해했다. 비상사태를 알리는 방송에서 마지막으로 들린 말은 "그것들은 사람처럼 생겼어요."라는 것이었다. 2.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다가 조금 졸린 기분이라 휴게소에서 차를 세웠다. 산책을 조금하고 돌아왔을 때 차가 출발하는 것이 보였다. 3. 당신이 정말 12년 동안 최선을 다했다는 게 느껴져! 원래는 한 명이면 충분했는데, 여동생도 너무 귀여워서 데려가야 할 거 같아. 4.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드디어 그 지옥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내 부상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한 의사가 나를 부모님에게 인계하도록 경찰에게 전했을 때는 다시 절망했습니다. 5. 남자는 "위자료는 얼마든지 줄 테니까 이제 그만 이혼해!"라고 소리..
2021년 6월 16일. 오늘 경험한 사소하지만 괴이한 일을 기록한다. 업무 때문에 서울 송파의 모 지역의 빌라를 찾아갔다. 시간은 저녁 8시를 넘긴 시간. 서울이긴 하지만 골목 안쪽이라 인적은 드물다. 찾아간 집은 5층 맨 꼭대기. 꽤나 낡은 건물이라 엘리베이터도 없었다. 계단도 조금 낮고, 천장도 낮은 편이라 올라가는 내내 압박감이 있다. 5층에 도달하여 501호의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드극...... 치익... 취아아아... 카극..... 카그그그그.......] 초인종이 울리고 조금 있다가 인터폰으로 울리는 소리. 수화기를 드는 듯한 소리에서 이어지는 잡음들. [크극..... 카그그극...... 취기익....... 키이이이이.......] 오래된 스피커 특유..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이상한 경험을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부동산에서 청소 일을 할 때의 일입니다. 나름 집에서도 비슷한 일을 해봤기 때문에 익숙했던 탓인지 사장도 귀찮은 방이 있으면 알바인 나에게 맡겨버리는 일이 많았습니다. 확실히 무언가 나온다... 같은 꺼림칙한 일은 피하고 싶을 겁니다. 어느 날, 어떤 맨션을 하나 찾게 되었습니다. [사고 내역은 없지만 입주민이 자주 바뀌는 방] 부동산 정보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5층 건물의 3층에 위치한 방입니다. 예정대로 정해진 시간에 작업을 마치고 최종 점검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어떤 멜로디가 들렸습니다. 17시 알림 같은 건가? 청소를 끝냈다고 전화를 하고 있으려니 작은 진동도 느껴지고, 캉캉 차단기 소리도 들립니다. 겨울이라..
상태가 안 좋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안 좋냐고 하면 할 말이 없다. 아무래도 정신적 문제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정작 나 역시 어떤 상태인지 혼란스러우니까. 그저 정상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 알 수 있었다. 정신과...... 정신병원을 가야 한다. 아마도 분명...... 정신병원으로 알고 도착한 곳은 예상과 조금 다른 곳이었다. 병원이라기보다는 유치원에 더 가까운 모습. 혹시 아동전문인 걸까?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다. 어찌어찌 물어물어 8층의 직장인 대상 상담실을 안내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오셨나요?" "어, 상담이 좀 필요해서요." "어떤 문제가 있으시죠?" "네? 그건 정확히 모르겠는데......" "여기는 처음 오시나요?" "네, 당연히 처음......" "저를 보는 것도 처음이시..
1. 우리가 함께 산 지 두 달 정도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직 나를 눈치채지 못해서 다행입니다. 2. 저는 최초의 로봇 시민이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이 붉은 구동액이 흐르는 껍질을 파헤치고 안쪽에 있는 회로를 보여주면 의사들도 내 말을 믿을 겁니다. 3. 폐건물을 샅샅이 조사한 끝에 벽돌로 덮인 문을 발견했습니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게 유일한 출구인 모양입니다. 4. 내가 이사 가는 날, 나는 이사오는 사람에게 "이곳 사람들은 정말 부드럽다."라고 말했다. 실제로는 질겼지만 그렇게 말했습니다. 5. 언제 죽을지 알면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을 줄 알았어. 하지만 죽음이 나에게 부서진 회중시계를 건낸 이후 하루에 두 번씩 공포에 시달리고 있어.
좀처럼 잠들기 어려운 밤이다. 잘 때다 지났지만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지만 오늘은 정도가 조금 심했다. 일부러 눈을 감고 열심히 잠을 청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한참을 뒤척이다 옆으로 돌아누운 채 눈을 뜨고 말았다. "흡!" 정신을 차렸을 때는 식은땀을 흘리며 천장을 보고 있었다. 뭐였을까. 분명 사람 같았는데...... 방에 있을 리 없는 낯선 사람. 명암이 확실하지 않은, 색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 커다란 눈. 귀신이라도 본 걸까? 아마 잠이 안 온다고 뒤척이나 어느 순간 잠이 들고, 악몽을 꾼 모양이다. "후우......" 겨우 잠들었는데 악몽 때문에 깨다니...... 아쉬운 일이다. 바로 저기에 귀신이...... "허읏!" 어느새 또 천장이 보인다. 뭐였지?..
어느 날 한 남자가 여신을 보았다. 언제나 밝은 후광에 감싸여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여신을 보았다. 눈부신 빛 속의 여신은 언제나 그의 경외를 받았으나 날이 저물기 직전 잠시 빛이 흐려지는 순간 그는 여신의 보았고 경외 대신 사랑을 바쳤다. 하지만 여신은 인간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인간의 목소리는 신에게 닿지 않기에 남자의 마음은 메아리보다도 의미 없었다. 실의에 빠진 남자는 서서히 말라갔고, 차라리 죽기를 결심한 어느 날 악마가 나타났다. 악마는 남자의 수명을 오 년 바치면 그 여신을 집에 데려다주겠다 하였다. 남자는 죽기 전의 목숨으로 잠깐이라도 여신을 보기 위해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악마는 내일 아침이면 여신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남자는 자신이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
1. 악몽 속에서 실종된 딸이 갈라진 벽 틈으로 살려달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나는 깨어나자마자 얼른 달려가 벽의 틈에 석고를 발랐다. 2. 거친 중년의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소년을 향해 사제는 "제가 주님을 대신하여 이 아이를 구할 힘을 주소서!"라며 소리쳤다. 소년은 침대에 묶인 채 단지 후두염일 뿐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갈라진 목에서는 괴상한 울부짖음만 나올 뿐이었다. 3. 혼자 살게 된 이후에도 블루투스 헤드폰을 써고 있으면 그다지 외롭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내가 헤드폰을 쓰고 다니지 않았으면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더 빨리 깨달았을 겁니다. 4. 최후의 심판대에서 그는 "나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어요!"라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사형집행인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확신에 ..
오늘은 다른 학교 친구를 보러 그 학교로 놀러 갔다. 자주 볼 수 있는 친구는 아니라 그런지 아니면 다른 학교가 낯설어서 그런지 조금 이상한 기분이다. 음, 전자보다는 후자의 이유가 더 맞는 것 같다. 그 학교는 멋있는 걸로 꽤 유명하니까. 통유리로 된 외관에 한 번 놀라고, 박물관 같은 내부 인테리어에 또 한 번 놀라고, 전시회처럼 걸린 그림들이 너무 멋져서 또 놀랐다. 정말 유명할만한 학교다. "야, 저기도 뭐 있다!" "뭐야? 와! 이건 어떻게 그린 거지?" 여고생들에게 새롭고 흥미로운 게 가능한 장소만큼 멋진 게 또 있을까. 한참을 꺄꺄 소리를 지르며 뛰었더니 결국 친구가 한 마디 했다. "야! 니들은 나 보러 온 거냐? 학교 놀러 온 거냐?" "당연히 너네 학교 놀러 왔지!" "야 이 씨!" 사..
1. 제 웨딩드레스는 흰색에 금색으로 장식을 달았습니다. 그 아래 피부는 검고, 파랬지만요. 2. 룸메이트가 3주째 방에서 나가지를 않습니다. 우울증인 건 알지만 냄새가 너무 심해서 어떻게든 해야겠습니다. 3. 나는 항상 그녀의 눈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어. 근데 지금 거울을 보니 나한테 더 잘 어울리네. 4. 아이의 몸에 어른의 뇌! 그리고 그 외에 많은 것들을 냉장고에 담아놨습니다! 5. 그녀는 불안에 떨며 급하게 차에 타 문을 잠갔다. 내가 이미 뒤에 타고 있는 것은 눈치 못 챈 모양이다.
민들레 씨앗을 본 적 있는가. 하얗게 번져나가는, 작은 생명들을 본 적이 있는가. 한없이 가볍고 작은 그 안에 한 송이 꽃을 품고, 또 한 다발의 씨앗을 품고 날아가는 최초의 가능성을 본 적이 있는가. 탐스러운 민들레 한 송이가 풍성한 씨앗을 만들고, 작은 바람이 그들을 날려보낸다. 그중 하나의 씨앗이 나뭇잎을 스치고, 새의 부리를 피하고, 개미에게 물렸다가 다시 날아올라 작은 돌풍에 휩쓸렸다. 돌풍에 끌려간 씨앗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떨어져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약간의 물기에 의존해 싹을 틔우고, 예상외로 부드러운 땅에 순조롭게 뿌리를 내렸다. 조금 더운 바람은 지금이 자라기 좋은 때라는 것을 알려주고, 뿌리내린 땅에서 솟아오르는 양분 넘치는 물이 그 성장을 응원한다. 민들레는 그 좁고 어두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