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주목해 주십시오. 언젠가부터 우리는 자연의 것들을 우리 마음대로 다루고 있습니다. 툭하면 자원을 고갈 시키고, 야생 생물들을 위기로 몰아넣고, 그걸 또 복원한다고 손을 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겁니다. 모든 것을 우리의 통제 아래에 놓아야 안심이 된다는 거죠. 자원이 많으면 많다고 소모하고, 부족하면 부족하다고 대책을 찾습니다. 특정 생물의 개체 수가 많아지면 그것 때문에 생태계가 망가진다고 난리고, 적으면 또 적어서 멸종한다고 난리입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짓을 반복할 거냐는 말입니다. 우리 역시 이 광활한 우주에서는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개입하지 않아도 자연은 스스로 순환하고, 복원해 나갈 것입니다. 혹시 그러다가 생태계가 망가지는 부분이 눈에 띌 수도..
어디부터 말하면 좋을까. 일단 확실한 것은 이 악몽 같은 현실의 시작이 불면증이었다는 거다. 밤마다 악몽을 꾸고, 깨고, 다시 잠들지 못하고…… 똑같은 악몽도 아니고 매번 조금씩 다른 악몽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수면제를 먹어보기도 했지만 단지 잠을 잘 깨지 않을 뿐 악몽에 시달리는 것은 똑같았다. 오히려 밤새 악몽에 시달려 더 피폐해졌다. 깨어 있는 시간이 악몽을 꾸기 위한 준비 같았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날도 많았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정말 효과가 좋다는 수면제를 하나 추천받았다. 무슨 성분이 어쩌고 했는데 그런 건 잘 모르겠고, 하여간 꿈도 꾸지 않게 잠들게 해준다고 했다. 정말 지금 딱 필요한 약이었다. 친구에게 약을 받아 집에 돌아와 한 입에 털어 넣..
행운에는 총량이 있다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이 가지는 행운의 양이 정해져있고, 그걸 조금씩 소모하면서 살아간다는 모양이다. 아마 사람마다 정해진 양이 다를 것이고, 그 이상의 행운은 불운을 가져온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불운으로 먼저 값을 치르고 행운을 받았나 보다. 어릴 때 한 번 죽을 뻔했던 이후로 언제나 행운이 따랐다. 모든 순간 이기거나 잘 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순간만큼은 놀랄 만큼 운이 따라 주었다. 아마 불운을 겪은 만큼 행운이 넘치기 때문일 거다. 공부는 그다지 할 필요 없었다. 적당히 풀 수 있는 것만 풀고 모르는 것은 찍으면 된다. 그래도 중상위권은 충분했다. 일도 열심히 할 필요 없었다. 운이 좋은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직장 생활정도는 유지할 수 있었다. ..
G는 누구나 알아줄만한 대학의 미대생이지만 정작 그에게 그림은 단순한 숙제, 작업물이었다. 재능 있다는 소리를 들으며 학원을 다니고, 실제로 그 결과 좋은 대학도 오기는 했지만 그는 한 번도 그림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미술은 ‘예술’이 아닌 ‘기술’이었다. 전혀 매력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예 미술에서 손놓고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어쨌든 대학은 졸업할 생각이고, 가능하면 이 길로 나아갈 생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과제는 빼놓지 않았고, 전시회를 다니며 연구도 하고 있었다. 그날도 레포트 제출을 위해 전시회를 갔다. 유명한 누군가의 그림이라고 하지만 G에게는 역시 기계적 출력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어떤 부분에서 예술이라고 평가하는지 지식적으로는 알지만 이해하고 ..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한 B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부터 갔다. 요즘 출장을 유난히 자주 다닌 탓인지 온몸이 찌뿌둥하니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나마 이번 출장은 장거리라고 업무 앞뒤로 하루의 여유를 줘서 쉴 시간은 충분했다. 다만 혼자라는 점, 그리고 경비로 처리할 수 있는 비용이 많지 않다는 점 때문에 여행 분위기를 마음껏 내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제주도까지 왔는데 흑돼지든 뭐든 맛있는 것 정도는 먹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 결국 B가 선택한 것은 숙소를 저렴한 곳으로 잡고 그 돈을 식비에 보태는 것이었다. 편한 잠보다 좋은 밥을 선택한 것이다. 공항에서 회사 이름으로 빌린 렌터카를 타고 도착한 곳은 ‘ㅇㅇ장’이라는 여관이었다. 이래저래 낡기도 낡았고, 시설이라고는 싸구려 냉장고와 작은 TV 하..
동생이 죽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몇 년 되지 않았는데 이제 동생마저 죽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과 보험금으로 살 집을 마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작지만 여자 둘이 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집이었다. 힘들지만 그래도 살았다. 슬퍼도 살았다. 그런데 이제 좀 잊고 살만 해지니까 동생이 부모님 곁으로 갔다. 급사? 과로사?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동생에게 병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동생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다들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동생은 어지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툭하면 어지럽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건강한 모습이라서. 힘든 일도 척척해내고 쉴 때 쉬는 요령 있는 아이라서..
초등학생일 때 학교 앞에는 문방구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조금 크고 세련된 곳이었는데 조금 좋아 보이는 볼펜이나 공책 같은 것들을 팔고 있었다. 형광펜도 그냥 편의점에서 파는 것보다 2배는 더 비싼 것들도 있어서 가끔 그런 것을 사온 아이들이 자랑을 하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굉장히 작은 구멍가게였다. 겉에서 보기에도 작은 가게였는데 안에 들어가 보면 물건이 꽉 차 있어서 쉽게 돌아다니기도 어려웠다. 먼지도 많고, 물건들에 가려져서 어둡기도 한 그런 가게였다. 주인아저씨도 항상 말이 없고, 손에는 큰 흉터도 있어서 아이들은 그 구멍가게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그래도 장사가 됐던 것은 그 가게에서만 파는 장난감이나 간식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고 유독 거기에만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살려달라는 힘없는 외침과 절박한 표정, 피가 엉긴 손, 꺼져가는 눈동자. 천천히 죽어가는 그 여자를 끝까지 지켜보며 있었던 자신. 그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자연히 생활은 엉망이 되었고, 툭하면 잠에서 깨기 십상이었다. 고통의 나날. 이런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살인자에게 어울리는 그런 삶이었다. 하지만 참았다. 고통스럽지만 그 이상으로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성당을 찾았다. 이제 그만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의 죄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의 죄를 고백하고자 합..
원룸촌 근처 편의점에서 일하다 보면 정말 온갖 사람들을 다 볼 수 있다. 생각보다 진상은 적지만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게 원룸촌이다. 속옷 위에 대충 롱 패딩만 걸치고 오는 손님. 사는 것도 없으면서 기웃기웃 매장 안을 살피기만 10분 이상 하는 손님. 꼭 식사시간에 와서 사람 쉬지 못하게 하고 라면 냄새 풍기는 손님. 매장 문 앞에서 담배 피는 손님.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꼭 반대로 버리는 손님. 등등. 항상 고정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고정적으로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그래도 역 앞이나 술집 근처, 아파트 단지 근처 편의점의 사연을 들어보면 그것보다는 낫다 싶긴 하다. 워낙 오는 손님만 오다 보니 대충 뭘 살지, 뭘 할지 예상이 되는 것도 좋은 점이다. 그..
비가 많이 오던 어느 여름 장마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흙바닥 놀이터가 별로 없지만 어릴 때만 해도 놀이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흙바닥, 모래바닥이었다. 아이들이 헤집으며 노는 놀이터에는 비가 오면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긴다. 물웅덩이가 생기면 또 그 물을 가지고 놀고, 물을 흘러가게 하면서 놀고, 흙을 매우면서 놀았다. 비가 많이 온 다음 날이었다. 놀이터에는 전에 없이 큰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이미 많은 아이들이 모여 그 물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아이들 손으로 두 뼘, 깊이도 손등이나 겨우 잠기려나 싶은 물웅덩이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욕조처럼 넓고 손목이 다 잠길만한 물웅덩이가 생긴 것이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이 작은 호수를 꾸미고 놀았다. 한참을 놀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주변..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외계 생명체들이 침입하고 있다. 그 외계 생명체들은 크고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어지간한 도시를 초토화 시킬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극소수의 일부만 그것을 알고 대비할 뿐이다. 그리고 마법소녀 리-제네레이션도 그중 일부다. 아니 일부였다. 지구에는 많은 히어로들이 존재하고 각자 다양한 개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몸에서 불을 뿜거나 물이 될 수 있거나 순간이동을 하거나 하는 등의 능력들이다. 그중에는 외계 생명체와 싸울 수 있는 능력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소녀의 능력은 후자였다. 마녀의 힘을 계승한 소녀가 가진 힘은 재생이었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순식간에 나아버렸다. 아니 상처가 낫는 정도가..
바람개비는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장난감이다. 가위로 종이를 오려 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재주가 좋은 아이들은 몇 장의 종이를 접어 가위질도 없이 커다란 바람개비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종이를 오리는 것도, 접는 것도 모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아이들이 새로운 바람개비를 들고 와 놀았다. 색색의 색종이들이 빙글빙글 돌며 햇빛에 반짝거렸다. 한가로운 바람에, 달리는 아이들의 서슬에, 인내심 부족한 아이의 날숨에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날씨는 맑고, 주변에 시끄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논둑길 어딘가. 심심했던 아이들이 변덕스럽게 만든 바람개비를 들고 나와 노는 모습을 아이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을 들어 ..
그림자가 숨 가쁘게 움직였다. 아이는 이미 몇 번이나 그림자 연극을 봤지만 매번 가슴 졸이며 긴장했다. 지금 보는 장면은 괴물이 도망치는 주인공을 쫓아가는 부분이다.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주인공은 넘어지기도 하고, 기기도 하면서 괴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애쓴다. 괴물은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한 번에 크게 크게 움직이기 때문에 주인공은 도망치지 못한다. 지친 주인공이 빨리 달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아이는 다음 순서를 알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주인공이 다급하게 주변을 두드리고 도움을 청하다 뒤돌아 괴물을 마주 보는 장면이다. 그림자뿐이지만 주인공의 절망과 공포가 아주 잘 느껴졌다. 얼굴 표정이 세세하게 나타나지 않아도 그 목소리와 대사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이는 바짝 얼어붙은 ..
[띵동] 시간이 충분했기에 여유롭게 초인종을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띵동띵동]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꾸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집에 있을 텐데? 보통은 2, 3번만 초인종을 눌러도 나올 텐데…… 불안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밖에 서 있어도 되는 걸까? 지금이라도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손바닥에 땀이 차고 호흡이 불안정해질 때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거기서 뭐 해요?” “응?” 아내였다. 아내가 옆집에서 문을 열고 나와서 황당하다는 듯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여기……” “바보 같기는… 그 집이 아니잖아요.”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이 집에 들어온 후 주변 집들을 하나씩 방문 중이다. 그리고 어제는 옆집에도 방문했었다. 민..
흙냄새가 났다. 술에 취한 탓에 착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잠이 덜 깨서 꿈속을 헤매는 건지 몰라도 어릴 때 맡던 그 냄새가 났다. 시골 사는 사람에게 흙냄새는 공기의 냄새와 다르지 않다. 새벽같이 밖으로 나서면 눅눅하게 물기를 먹은 흙냄새가 코 끝을 스치고, 밭이든 논이든 가기만 하면 풀 냄새 섞인 흙냄새가 다가온다. 한발 내딛으면 흙이고, 물러서도 흙이니 오히려 흙냄새를 잘 몰랐다. 흙냄새가 그렇게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서울에 온 후였다. 정확히는 서울 생활을 하다 다시 시골을 갔을 때였다. 그전까지는 몰랐던 흙냄새가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냄새가 슬며시 코를 간질였다. 지금은 날 리 없는 그런 냄새였다. 아마도 꿈속에서 시골이라도 다녀온 걸까 싶었다. “어? 일어났냐?” 함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