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 사이의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비가 내린 후의 습기와 이제 막 달아오르는 아스팔트가 만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살짝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날씨다. 만일 여기가 사막이었으면 바다가 나타났다고 소리 지르머며 뛰어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는 그때였다. 신기루로 물결치는 길 위로 무언가 검은 것이 슬금슬금 지나가다 눈이 마주쳤다. "어......" 골목에서 무언가 기어 나왔을 때 처음에는 고양이인가 싶었다. 하지만 어디가 머리인지 꼬리인지도 모를 그 검은 덩어리는 고양이는 고사하고 어떤 동물과도 닮지 않았다. 잠시 헛것을 본 건 아닌가 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떠보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길 한가운데 있었다. 버려진 인형 같은 건가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살아있는 무언가였다. 비..
얼마 전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사실 등산이라고 해도 그냥 '걷기 운동을 하는데 그 장소가 산이었다.'라는 느낌이다. 장비를 살 것도 없이 평소 입던 옷에 신발만 새로 사서 신고 야트막한 언덕이나 걷는 것이다. 그나마 조금 더 취미라고 할만한 부분은 언제나 새로운 장소를 찾아서 돌아다닌다는 것 정도다. 일반적인 등산 코스가 아닌, 어딘가의 동네 뒷산, 시골구석에 있는 산인지 동네인지 경계가 불명확한 언덕. 그런 곳을 찾아다닌다. 가끔 길을 잃는 경우는 있었지만 워낙 낮고 좁은 곳들이라 위험한 일은 없었다. 생각보다 깊이 들어가 고생한 적도 있지만 어찌어찌 잘 나왔다. 오늘도 적당히 차를 몰고 시골 동네 아무 곳이나 찾아서 걷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안개처럼 내리는 부슬비 정도..
여기는 또 어딜까? 처음 보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천장을 보는 게 몇 번 째일까. 그 이전에 난 누구일까?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이 뿌옇지만 곧 괜찮아질 거다. 이번에는 누가 된 것인지도 조금씩 생각날 거다. 어제까지는 50대 아줌마였다. 한 달 정도 전에 변해서 나름 열심히 살았다. 두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보험 일도 열심히 했고, 둘째의 생일을 챙겨준다고 일찍 집에 들어가다가...... 거기서 기억이 끊겼다. 어떻게 된 걸까. 생각해 보면 계속 이런 식이었다. 새로운 기억과 몸에 적응하여 충실히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몸이다. 그 전에는 입시를 준비 중이던 10대 학생이었다. 엄마는 괜찮을까? 아빠도 걱정을 많이 할 텐데...... 또 그전에는 30대 회사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기다리고 있..
슬슬 여름이 찾아오는 시기가 되었다. 점점 높아지는 기온과 습도가 조금 쉽게 짜증 나게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기분을 안 좋게 하는 것은 곰팡이였다. "아, 이건 못 쓰겠네." 아동용 이불이 완전히 망가졌다. 동물들이 웃고 있어야 하는 자리는 시퍼렇게 물들었고, 어떤 게 사자고, 여우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M씨는 세탁기에서 꺼낸 이불을 집어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혹시 살릴 수 있을까 해서 세탁기를 돌려보았지만 괴상하게 뭉개진 동물들의 웃음만 확인했을 뿐이다. 이 이불은 M씨의 아들이 좋아하는 애착 이불이었다. 겨울에 창고로 보낼 때도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였다. 이제 아주 망가져 버렸으니 얼마나 난리를 칠지 걱정이 앞섰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이불을 언제 꺼내냐고 매일 물어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불..
나는 감각을 모릅니다. 잊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습니다. 듣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냄새가 무엇입니까? 맛이 무엇입니까? 내 몸이 있기는 있습니까? 아무것도 못 느끼는 채 생각만 부여하던 가련한 영혼을 향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메세지가 닿았다. 그것은 보인 것도 아니고, 들린 것도 아니다. 그저 전해졌고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생존과 활동은 확인되나 유의미한 자극 생성 및 전송은 실패. 이에 따라 프로젝트 '통 속의 뇌'는 폐기.]
서울 모 지역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아니 연쇄살인은 아니다. 사건은 모두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으니까. 경찰이 처음 현장에 들어선 것은 사건 당일이 아니라 며칠 후였다. 한 건물에 있던 사람이 모두가 죽었기에, 정확히는 자폐증 소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기에 신고가 늦었다. 정기적으로 이 복지센터를 방문하던 자원봉사자가 아니었다면 그 남은 소년 역시 굶어죽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었다는 신고에 출동한 경찰이 본 것은 잔인하고 처참한 살인의 현장이었다. 온갖 방법으로 살해당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단, 하나도 멀쩡한 시신이 없었고, 그 살해 과정이 겹치는 경우도 없었다. 피해자는 총 12명. 복지센터의 센터장과 상주상 담사, 행정실 직원, 센터에서 보호받던 사람 9..
세상 모든 상처가 아픔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작은 상처가 끔찍하게 아프기도 하지만, 너무 큰 상처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아프지 않기도 한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더해지면 두 배는 아플 것 같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떨 때는 3배, 4배의 아픔이 찾아오지만, 어떨 때는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 어쩌면 상처마저 죽어버려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응, 아마 그럴 거다. 나는 이 사실을 아주 어릴 때 배웠다. 얇은 회초리로 맞은 게 몽둥이보다 아플 수 있다는 것도 배웠고, 주먹에 맞은 것보다 맞아서 넘어질 때 긁힌 자국이 더 아플 수도 있다.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맞다 보면 오히려 아프지 않기도 했다. 대신 조금 어지럽기는 했지만. 그리고 내 동생. 이 아이는 아주 작은 상처도 끔찍하게 아파했다. 저..
어이구, 뭐 하는 거니? 밥 먹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갔어? 계속 그렇게 드러누워만 있을 거야? 하여간 뭐 하나 재깍재깍 하는 게 없구나. 뭘 그렇게 쳐다봐? 그렇게 마음에 안 드니? 그렇게 싫어?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키워줬니? 먹이고, 재우고, 너 하고 싶다는 거 어지간한 건 다 해주고...... 이제 엄마도 좀 누리면서 살고 싶다. 솔직히 엄마가 그 정도 자격은 있지 않니? 그러니까 그만 좀 귀찮게 하게 얼른 가려무나. 지 아빠도 그렇게 속 썩이고 느그적거리더니...... 아주 지 아빠랑 똑같아요. ...... 뭐해? 얼른 뒤지지 않고.
J는 살짝 밀려드는 한기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안 그래도 요즘 잠을 잘 못 자는데 이렇게 깨버리니 오늘은 잠들기 틀렸나 보다 싶었다. "아..." 피곤 탓인지 방이 건조한 탓인지 목이 바짝 말라 갈라지 목소리가 났다. 밀려오는 갈증에 J는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향했다. 방에서 나와 생수 하나를 꺼내 컵이 따르고 있으려니 어질러진 거실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엄마는 들어오지 않은 걸까. 그러고 보니 오늘 야근이라고 했던 것도 같다.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모습이 갑자기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몇 년 전에 언니가 집을 나가고, 그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이혼했다. 언니가 사라진 후에도 그랬지만 아빠가 나가 버린 이후로는 집이 너무 넓은 느낌이라 무서웠다. 하지만 두 분은 언니가 없어..
어느 날인가 이사 차가 아파트 앞에 와있었다. 사다리가 걸린 집이 어딘가 보니 내 옆집이다. 드디어 사람이 들어오는 건가? 그동안 빈집이라 조용하고 좋았는데. 시끄러운 집이면 어쩌지? 일주일이 지났다. 안 좋은 예감은 왜 틀리지를 않는 걸까. 어제부터 옆집에서 조금씩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이는 톡톡 노크하는 듯한 소리. 그 후에는 쿵쿵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이제는 득득 긁는 소리. 하루 종일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들리는 소리들이 나를 괴롭혔다. 도대체 뭘 하길래 이런 소리가 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가구 배치가 아직 안 끝났나 보다 하고 넘겼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계속 들려오는 소음은 도저히 그냥 참아 줄 수 없었다. "저기요! 조용히 좀 합시다!" 결국 벽을 두..
세상을 살다 보면 저절로 쌓이는 지혜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연륜이라 부르고, 나이를 먹는다면 것이 단순히 잃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 삼는다. 어떤 면에서는 자부심도 가지며 자랑스러워한다. 이런 지혜를 가지고 그저 묵히기만 하는 것도 낭비인 일이라 젊은 놈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지만. 글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젠장, 망할 놈들이 사람을 꼰대 취급이나 하고......" 역시 여물 지도 않은 놈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못 알아듣는다면 본인의 수준 낮음을 알고 죄송할 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어른을 우습게 아는 것은 무슨 예의인가. "하여간 요즘 것들은......" 술에 취해 홀로 성질이나 부리며 집에 가는 밤거리. 그때 서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 것은 우연..
전화를 하려다 떨어진 폰을 집어 들었다. 마침 카톡이 왔다. 누나 (뭐하냐) 뭐라 해야 하나......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어 적당히 말했다. 나 (그냥) 누나 (그냥은 무슨 ㅋ 살아는 있냐?) 살아는 있냐니 무슨 질문이 이러냐. 나 (몰라 죽은 듯) 누나 (ㅋㅋㅋㅋㅋ) 누나 (그럼 반찬 안 줘도 됨? 엄마가 갖다주라는데) 아, 이건 생각을 못 했네. 별 수없이 지금 오라고 해야 할 듯하다. 내가 없을 때 오면 이 난장판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지. 나 (올 거면 지금 와 나 좀 있다가 나갈 거야) 누나 (아 왜 지금이야) 나 (지금 아니면 못 볼 거 같은데) 누나 (진짜 귀찮네 기다려 갈 테니까) 나 (ㅇㅇ 기다릴게) 누나 (오늘따라 좀 이상하네? 별일 없지?) 나 (아직은 없어) 누나 (ㅋㅋㅋㅋㅋㅋㅋ..
요즘 좀 그렇단 말입니다. 실적이 줄어드는 게 우리 탓도 아닌데 상부에서는 자꾸 개선을 하라고 해요. 자기들이야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좋은 시절 보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잖아요. 인구 상승률만 봐도 답이 나오죠. 평균 출산율 3명, 4명 찍던 시기와 1명이 되네 마네 하는 지금이랑 같습니까? 호황기는 이미 지났고 통계를 맞춰보면 지금은 꽤 선방하는 중인데, 하여간 운 좋아 실적내고 승진한 양반들은 그걸 몰라요.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까라면 까야지. 무조건 올해 목표치를 채우라니까 우리도 뭐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라고 이러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라는 건 알아달라 이겁니다. 그러니까 너무 원망하지 마세요. 그냥 감기 걸린 거 가지고 이러는 법이 어디 있냐고 하실 수도 있는데, 원래 죽음이란 건 이유가 없는..
나는 오늘도 달린다. 온 힘을 다해 달리고, 또 달리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면 깨어난다. "으헉!" 꿈에서 달린 영향인지 온몸은 땀투성이에 숨은 거칠기 짝이 없다. 벌써 일주일이 넘게 이러고 있다. 덕분에 잠을 자도 피곤은 가시지 않고 오히려 쌓여만 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꿈속에서 온 힘을 다해 달리는 동안 알 수 없는 기쁨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러너스 하이? 그런 명칭이라고 했던 것 같다. 달리다 보면 아드레날린이 왕창 나와서 취한 듯 기분 좋은 상태가 된다고 한다. 그걸 나는 꿈에서 경험하고 있다. 진짜 달리는 것도 아니면서. 체력적으로 조금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못 버틸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몸은 더 좋아진 느낌이다. 꿈이 너무 실제 같아서 정말 운동 효과라도 있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좋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