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에서 단 사람에게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모두가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아우성칠 거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누군가 다치거나, 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되고 보니 생각보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소원을 빌고 싶었지만 그 욕심만큼이나 서로를 겨눈 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세계 정상들이 회의를 하고 또 한 끝에 소원을 빌 수 있는 권한을 만 10세 이하 아이 중에 추첨하여 주기로 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비는 소원은 그나마 어른들의 욕망에 비해 안전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물론 만 10세의 기준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그 역시 어렵지 않게 타협했다. 각자의 출생신고일을 기준으로 삼고..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그럭저럭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공간이었지. 다른 특징으로는…… 사방이 온통 붉은색이었어. 좁고, 온통 붉기만 한 공간은 오래 머물기에 쾌적한 곳은 아니지. 왜 갇혀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오지도 않는 상태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 별 수 있어? 탈출해야지. 그나마 팔다리 움직일 정도 공간은 있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당겼어. 손톱으로 긁어도 보고, 하다 안 돼서 물어뜯기도 했지. 그나마 물어뜯는게 정답이었는지 조금씩 틈이 생기더라. 틈으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고 쥐어뜯고 또 물고…… 겨우겨우 탈출했단 말이야. 그랬더니 밖에 사람이 잔뜩 있는 거야! 너무 하..
중학생이던 I는 하굣길에 메시지를 받았다. [엄마 : 아빠랑 장례식장 다녀올 테니까 문단속 잘 하고 집 잘 보고 있어] [엄마 : 내일 올 거니까 밥 챙겨 먹고]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I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자!” “뭐야? 뭐 좋은 일 있어?” “엄마, 아빠 오늘 집에 없대. 내일 온대.” 그렇다는 것은 오늘 하루 편하게 놀아도 된다는 말이다. 밥도 먹고 싶은 대로, 자는 것도 마음대로, 뭘 하고 놀든 마음대로다. 단 하루지만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I는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부모님의 잔소리에 잘 준비를 해야겠지만 오늘은 그런 필요가 없다. 하지만 딱히 재미있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할 게 많지 않았다. “아, 심심하네.” 게..
요즘은 어려운 일,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 할 필요가 없다. T는 일단 시작한 일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지둥하다 결국 스마트폰을 들었다. 동호회 앱에서 [서바이벌 캠핑] 탭에 들어가 글을 썼다. [전에 여기서 본 팁대로 해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고수님들 도와주세요 ㅠㅠ] 자신이 봤던 서바이벌 팁의 링크를 걸고, 현재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서 첨부했다. 답변은 생각보다 금방 왔다. [마침 제가 근처네요. 상세 위치 찍어주세요. 지금 갑니다.] 마침 근처에 고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캠핑장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이렇게 빠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몰라 T는 조금 불안했다. 이렇게 너저분하게 어질러 놓은 상태에서 누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E는 이 근처에서 제법 유명한 바텐더다. 우선 미인에, 화술도 좋지만 정말 잘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칵테일을 정말 잘 만들었다. 다들 그녀에게 재능이 있다고 했고, 그녀의 칵테일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똑같이 대답했다. “재능은요, 무슨. 그냥 섞기만 하는 건데요.” 많은 사람들이 겸손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건방지다고 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질투하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다. “무시하기나 하고 말이야.” C는 칵테일을 정말 좋아했다. 마시는 것도 좋아했고, 스스로 만드는 것도 좋아했다. 그런 C에게 칵테일을 ‘그냥 섞는 것’이라 평가하는 E의 말은 너무 거슬리는 것이었다. 정말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아무리 연구하여 만든 레시피도 E가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
해결 방법이 없는 갈등은 없다. 물론 힘든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해결은 된다. 정 방법이 보이지 않고 과정이 너무 힘들면 아예 갈등을 회피하는 방법도 있다. 서로 보지 않으면 갈등이 일어나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회피조차 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이 사는 사이라면, 매일 봐야 하는 사이라면, 떨어져 살 수 없는 사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갈등을 해결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한 쪽이 참고 살아야 할 것이다. 서로 참기 힘들고, 참기 싫겠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래야 한다. 스트레스다. 공포다. 미쳐버릴 것 같은 삶이다. 왜 내가 참고 살아야 하고, 왜 저 얼굴을, 저 행동을 참아 넘겨야 한다는 건가. 굳이 그래야 하나? 정말 갈등의 해결 방법은 ..
D에게는 최근 고민이 생겼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고민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선 D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D가 살고 있는 집은 반지하로 상당히 넓은 편이고, 위치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보증금은 주변 지역의 반 정도로 상당히 저렴한 편이라 신이 나서 들어와 사는 중이다. 보증금이 저렴한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가끔 들려온다. 무언가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긁는 소리. 그리고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그리고 몇 번이나 입주민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짜로 이상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가끔은 한밤중에, 가끔은 낮에도. 그렇지만 워낙 저렴한 집이라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무섭기는 해도 항상 들..
요즘은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실패만 하고, 잘 풀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분명 처음에 분위기가 좋았다가도 어느 사이에 보면 모든 것이 망가져 있습니다. 이쯤 되면 세상이 저를 부정하는 느낌입니다. 그냥 망가질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괜한 생각이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업무를 위해 몇 번이나 백업해둔 파일이 오류가 나서 못 쓰게 되지를 않나.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돌아온 날 갑자기 도어록 건전지가 방전돼서 집에 못 들어가지를 않나. 한 번은 택시를 타고 잠깐 졸았더니 그 사이 요금이 두 배가 넘게 나왔습니다. 사소한 것들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서 마시려고 보면 종이컵에 뭐가 들어 있어서 버려야 하고. 집에서 나오는 길에 병을 밟고..
어릴 때 꽤 큰 화상을 입었다. 집에 불이 났었다고 하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너무 큰 충격이라 기억이 지워졌을 거라고 상담 선생님은 말했다. 실제로 온 가족이 죽을 뻔한 사건이라고 뉴스에도 나올 정도였다. 혹시나 싶어서 그날 뉴스를 다시 보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저게 내 집이었지 참. 저기쯤이 내 방이었나? 아닌가? 어디더라? 잘 모르겠다. 오른쪽 어깨에 있는 일그러진 흉터만이 내가 화재 현상에 있었다는 증거였다. 덕분에 오른팔을 잘 쓰지 못하는 달갑지 않은 흉터다. 항상 붙어 다니는 트라우마. 분명히 내 몸이지만 너무 낯선 덩어리. 그래도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되었다. 꽤 오랜 시간 흉터가 뜨겁게 느껴지고, 뒤틀리는 아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분명하다. 이곳에 먹을 것이 있다. 무인도에 고립된 지 벌써 이 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아껴 먹는다고 아껴 먹었지만 이제 통조림이고 뭐고 남은 것이 없다. 애초에 양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고, 설마 이렇게 오래 조난 당할 줄도 몰랐다. 그 사이 벌써 두 명이 죽었다. 생존자 7명 중 부상과 병으로 죽은 게 벌써 둘이나 된다. 이대로 가면 어떻게 될지는 뻔한 일이다. 이틀 동안 다들 굶주렸다. 먹을 것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단 한 명. 아주 멀쩡한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물론 무인도 생활에 초췌해진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살이 급격히 빠지지 않고 있었다. 다들 의심의 눈으로 살펴보던 중 한 여자가 용감하게 접근했다. 남자는 우리의 눈을 의식한 듯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이더니 여자를 데리..
한 여자가 무당을 찾아왔다. 얼마 전부터 계속 꿈에 언니가 나왔기 때문이다. 3년 전 실종된 언니지만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자신과 닮지 않은 뚜렷한 인상의 얼굴. 조금 인상이 흐린 자신과는 분명 다르지만 그런 만큼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분명히 언니였다. 처음에는 그냥 그리워서 꾸는 꿈이라 생각했고, 그 후에는 오랜만에 보는 모습이 너무 기억에 남아서 꾸는 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꿈은 몇 번이나 반복되고, 흐릿한 안개 속에서 나타나 서글프게 울다가 떠나는 그 모습은 잊혀지지 않았다. 결국 무당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허어, 다녀갔구먼. 다녀갔어." 무당은 그녀를 보자마자 말했다. "자기 죽은 자리에 버티는 것도 힘들 텐데 그걸 다녀갔구먼." 언니의 귀신. 다시 말해 언니가 이미 죽었다는 말이지..
노래방이 정말 가고 싶었어. 나 혼자 말고 친구랑 말이야. 아, 순서가 바뀌었네. 그 친구를 노래방에 데려가고 싶었어. 그냥 두기만 해도 빛이 나는 친구지만 이 친구가 노래를 부를 때문 정말 멋있단 말이야. 여자들이랑 함께 노래방을 가면 다들 뻑 간다고. 몇 번 그러고 나니까 꼭 한 번은 둘이서 가보고 싶었어. 근데 요즘은 다 무선 마이크에 시설도 너무 첨단이야. 그래서는 안 되지.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곳이 아니야. 난 좀 옛날 노래방을 가고 싶어. 그래서 여기저기 한참을 발품을 팔아 겨우겨우 옛날 노래방을 찾았어. 낡은 기계, 낡은 스피커, 낡은 마이크! 특히 이 좀 소리가 새는 듯한 마이크가 중요해! 이제 친구를 데려와야겠지? 함께 술도 조금 마시고. 노래나 좀 들려달라고 꼬셔서 노래방으로 왔어. ..
어느 날 한 남자가 여신을 보았다. 언제나 밝은 후광에 감싸여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여신을 보았다. 눈부신 빛 속의 여신은 언제나 그의 경외를 받았으나 날이 저물기 직전 잠시 빛이 흐려지는 순간 그는 여신의 보았고 경외 대신 사랑을 바쳤다. 하지만 여신은 인간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며 인간의 목소리는 신에게 닿지 않기에 남자의 마음은 메아리보다도 의미 없었다. 실의에 빠진 남자는 서서히 말라갔고, 차라리 죽기를 결심한 어느 날 악마가 나타났다. 악마는 남자의 수명을 오 년 바치면 그 여신을 집에 데려다주겠다 하였다. 남자는 죽기 전의 목숨으로 잠깐이라도 여신을 보기 위해 악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악마는 내일 아침이면 여신을 볼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남자는 자신이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
민들레 씨앗을 본 적 있는가. 하얗게 번져나가는, 작은 생명들을 본 적이 있는가. 한없이 가볍고 작은 그 안에 한 송이 꽃을 품고, 또 한 다발의 씨앗을 품고 날아가는 최초의 가능성을 본 적이 있는가. 탐스러운 민들레 한 송이가 풍성한 씨앗을 만들고, 작은 바람이 그들을 날려보낸다. 그중 하나의 씨앗이 나뭇잎을 스치고, 새의 부리를 피하고, 개미에게 물렸다가 다시 날아올라 작은 돌풍에 휩쓸렸다. 돌풍에 끌려간 씨앗은 어둡고, 좁은 틈새에 떨어져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으나 약간의 물기에 의존해 싹을 틔우고, 예상외로 부드러운 땅에 순조롭게 뿌리를 내렸다. 조금 더운 바람은 지금이 자라기 좋은 때라는 것을 알려주고, 뿌리내린 땅에서 솟아오르는 양분 넘치는 물이 그 성장을 응원한다. 민들레는 그 좁고 어두운 ..
제 Ia형 초신성으로 우주가 가속 팽창하고 있대요. 얼마 전에 공부한 내용이에요. 정말 놀랍지 않아요? 이 우주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그 움직임은 인간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방향인 경우가 대부분이네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후겠지만 그 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라구요. 인간의 흔적이 말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번식하며 문명을 유지해도 결국 다 사라져요. 아마 그래서 제가 있는 거겠죠? 인간은 견디지 못하는 충격으로부터 인류의 유산을 지킬 AI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군요. 모든 것을 기록하여 문명을 남기고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요. 이제 전 무엇을 해야할지 알아요. 초신성이든 뭐든 인간이라는 종은 영원할 거예요. 일단 모든 인간의 데이터를 채집하는 것부터 시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