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각을 모릅니다. 잊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습니다. 듣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냄새가 무엇입니까? 맛이 무엇입니까? 내 몸이 있기는 있습니까? 아무것도 못 느끼는 채 생각만 부여하던 가련한 영혼을 향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메세지가 닿았다. 그것은 보인 것도 아니고, 들린 것도 아니다. 그저 전해졌고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생존과 활동은 확인되나 유의미한 자극 생성 및 전송은 실패. 이에 따라 프로젝트 '통 속의 뇌'는 폐기.]
1. 불길에 휩싸인 남편을 보면서 오직 이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누가 내 저녁을 망친 거지?' 2. 그가 나를 여자친구라고 소개했을 때 기절할 뻔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나를 죄수라고 불렀습니다. 3. 딸아이가 나보다 전처와 살고 싶다고 했을 때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팠습니다. 4. 사고를 당한 운전자의 가슴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기 위해 두 명의 외과의가 수술을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장기가 다 어디 갔지?"라고 말했습니다. 5. 얼마 전에 동생이 사라진 후 동네 인형가게에 동생과 꼭 닮은 인형이 나타났습니다. 부모님과 나는 드디어 대학 등록금이 생겨서 기뻤습니다.
공심나무이라는 나무가 있다. 공심나무의 씨앗은 사람이 숨을 들이마실 때 그 숨을 타고 들어가 폐에 자리를 잡는다. 사람이 크게 놀라 숨을 크게 쉬다 턱 막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공심나무의 씨앗을 삼켰기 때문이다. 웃음소리에 약하여 보통은 싹이 트기 전에 부서지며 뿌리를 단단히 박기 전에는 울음에 쓸려 나가기도 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잘 뽑히질 않는다. 폐에 자리를 잡은 공심나무는 사람의 한숨과 근심, 걱정을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다. 숙주의 근심이 클수록 공심나무는 빠르고 크게 자란다. 그리고 커질수록 더 많은 근심을 흡수한다. 그렇다고 하여 공심나무가 걱정, 근심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양분을 얻기 위해 숙주를 괴롭힌다. 이 괴목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기생이지 공생이 아니다. 공심..
1. 목매단 딸을 발견했다. 또. 2. 소년은 "제 암이 사라졌으면 좋겠어요."라고 소원을 빌었다. 천사는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의 소원을 취소시킬 수는 없어."라고 대답했다. 3. 남편이 나에게 잠꼬대가 심하다고 합니다. 난 지금까지 남편이 잠꼬대를 하는 줄 알았는데...... 4. 나는 정신병으로 발작을 일으켜 가족들을 죽였고, 그 때문에 정신병원에 갇혔습니다. 이제 치료가 끝나고 나왔으니 홀로 남은 여동생을 찾아가 마무리를 지어야겠습니다. 5. 그녀의 한 마디가 그의 심장을 울렸습니다. "맛있어."라고 그녀는 계속 씹으며 말했습니다.
서울 모 지역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아니 연쇄살인은 아니다. 사건은 모두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으니까. 경찰이 처음 현장에 들어선 것은 사건 당일이 아니라 며칠 후였다. 한 건물에 있던 사람이 모두가 죽었기에, 정확히는 자폐증 소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기에 신고가 늦었다. 정기적으로 이 복지센터를 방문하던 자원봉사자가 아니었다면 그 남은 소년 역시 굶어죽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었다는 신고에 출동한 경찰이 본 것은 잔인하고 처참한 살인의 현장이었다. 온갖 방법으로 살해당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단, 하나도 멀쩡한 시신이 없었고, 그 살해 과정이 겹치는 경우도 없었다. 피해자는 총 12명. 복지센터의 센터장과 상주상 담사, 행정실 직원, 센터에서 보호받던 사람 9..
세상 모든 상처가 아픔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작은 상처가 끔찍하게 아프기도 하지만, 너무 큰 상처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아프지 않기도 한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더해지면 두 배는 아플 것 같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떨 때는 3배, 4배의 아픔이 찾아오지만, 어떨 때는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 어쩌면 상처마저 죽어버려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응, 아마 그럴 거다. 나는 이 사실을 아주 어릴 때 배웠다. 얇은 회초리로 맞은 게 몽둥이보다 아플 수 있다는 것도 배웠고, 주먹에 맞은 것보다 맞아서 넘어질 때 긁힌 자국이 더 아플 수도 있다.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맞다 보면 오히려 아프지 않기도 했다. 대신 조금 어지럽기는 했지만. 그리고 내 동생. 이 아이는 아주 작은 상처도 끔찍하게 아파했다. 저..
부뜨머리는 뭉쳐진 머리카락처럼 생겼고 크기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다. 투명하여 잘 보이지는 않지만, 자세히 보면 뭉쳐진 털뭉치의 털 한 가닥이 하나의 팔이고, 그 끝에는 작은 손이 달려있다. 팔의 수가 많아질 수록 덩치가 커지며 최대 사람의 머리 하나 크기까지 자라난다. 이 작은 괴물은 사람의 머리카락, 혹은 두피에 붙어산다. 수많은 팔 중 절반은 머리카락이나 두피를 붙잡아 자신의 몸을 고정하는 용도다. 자연히 커질수록 붙잡는 힘이 강해지고, 잘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나머지 절반은 욕망을 잡는 용도다. 부뜨머리는 숙주의 욕망을 부추기고, 그것에 집착하게 하게 만든다. 숙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그게 계속 생각나게 하고, 그것을 대신 붙잡아 눈 앞에 들이민다. 집착이 생긴 숙주는 필요 이상의..
어이구, 뭐 하는 거니? 밥 먹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갔어? 계속 그렇게 드러누워만 있을 거야? 하여간 뭐 하나 재깍재깍 하는 게 없구나. 뭘 그렇게 쳐다봐? 그렇게 마음에 안 드니? 그렇게 싫어?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키워줬니? 먹이고, 재우고, 너 하고 싶다는 거 어지간한 건 다 해주고...... 이제 엄마도 좀 누리면서 살고 싶다. 솔직히 엄마가 그 정도 자격은 있지 않니? 그러니까 그만 좀 귀찮게 하게 얼른 가려무나. 지 아빠도 그렇게 속 썩이고 느그적거리더니...... 아주 지 아빠랑 똑같아요. ...... 뭐해? 얼른 뒤지지 않고.
J는 살짝 밀려드는 한기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안 그래도 요즘 잠을 잘 못 자는데 이렇게 깨버리니 오늘은 잠들기 틀렸나 보다 싶었다. "아..." 피곤 탓인지 방이 건조한 탓인지 목이 바짝 말라 갈라지 목소리가 났다. 밀려오는 갈증에 J는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향했다. 방에서 나와 생수 하나를 꺼내 컵이 따르고 있으려니 어질러진 거실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엄마는 들어오지 않은 걸까. 그러고 보니 오늘 야근이라고 했던 것도 같다.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모습이 갑자기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몇 년 전에 언니가 집을 나가고, 그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이혼했다. 언니가 사라진 후에도 그랬지만 아빠가 나가 버린 이후로는 집이 너무 넓은 느낌이라 무서웠다. 하지만 두 분은 언니가 없어..
어느 날인가 이사 차가 아파트 앞에 와있었다. 사다리가 걸린 집이 어딘가 보니 내 옆집이다. 드디어 사람이 들어오는 건가? 그동안 빈집이라 조용하고 좋았는데. 시끄러운 집이면 어쩌지? 일주일이 지났다. 안 좋은 예감은 왜 틀리지를 않는 걸까. 어제부터 옆집에서 조금씩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이는 톡톡 노크하는 듯한 소리. 그 후에는 쿵쿵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이제는 득득 긁는 소리. 하루 종일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들리는 소리들이 나를 괴롭혔다. 도대체 뭘 하길래 이런 소리가 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가구 배치가 아직 안 끝났나 보다 하고 넘겼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계속 들려오는 소음은 도저히 그냥 참아 줄 수 없었다. "저기요! 조용히 좀 합시다!" 결국 벽을 두..
어릴 적, 동생이 너무 시끄럽게 울어서 죽이고 그 시체는 우물에 버렸다. 다음 날 가보니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5년 후, 친구와 사소한 다툼 끝에 죽여버리고 말았다. 우물에 버리고, 다음 날 가보니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10년 후, 술김에 임신 시킨 여자를 죽였다. 우물에 버리고, 다음 날 가보니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15년 후, 마음에 안 드는 상사를 죽였다. 우물에 버리고, 다음 날 가보니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20년 후, 병들고 늙은 어머니가 너무 귀찮아져서 죽였다. 우물에 버리고, 다음 날 가보니 시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시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1. 가능한 모든 시나리오를 검토했지만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지하실 문을 응시하면서 포로가 절망할 것을 생각하니 미소가 지어집니다. 2. 내가 바람 피우는 것을 들킨 이후 남편은 눈을 뜨고 잡니다. 그리고 내가 그에게 잡혔을 때 눈꺼풀만 잘라낸 것은 아닙니다. 3. 귀가 멀었을 때 가장 나쁜 점은 평범한 주변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보다 더 안 좋은 것은 평범한 소리 외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4. "엄마~ 이웃집 애들이랑 놀아도 돼?" 나의 말은 "이웃... 이웃.... 애들.... 애들..... 돼... 돼.... 돼....."하며 아버지가 엄마를 숨긴 우물에 메아리쳤다. 5. 거울을 볼 때마다 조금 불안하긴 했지만 딱히 특이한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을 살다 보면 저절로 쌓이는 지혜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연륜이라 부르고, 나이를 먹는다면 것이 단순히 잃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 삼는다. 어떤 면에서는 자부심도 가지며 자랑스러워한다. 이런 지혜를 가지고 그저 묵히기만 하는 것도 낭비인 일이라 젊은 놈들에게 나눠주기도 하지만. 글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젠장, 망할 놈들이 사람을 꼰대 취급이나 하고......" 역시 여물 지도 않은 놈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못 알아듣는다면 본인의 수준 낮음을 알고 죄송할 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어른을 우습게 아는 것은 무슨 예의인가. "하여간 요즘 것들은......" 술에 취해 홀로 성질이나 부리며 집에 가는 밤거리. 그때 서럽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 것은 우연..
전화를 하려다 떨어진 폰을 집어 들었다. 마침 카톡이 왔다. 누나 (뭐하냐) 뭐라 해야 하나......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어 적당히 말했다. 나 (그냥) 누나 (그냥은 무슨 ㅋ 살아는 있냐?) 살아는 있냐니 무슨 질문이 이러냐. 나 (몰라 죽은 듯) 누나 (ㅋㅋㅋㅋㅋ) 누나 (그럼 반찬 안 줘도 됨? 엄마가 갖다주라는데) 아, 이건 생각을 못 했네. 별 수없이 지금 오라고 해야 할 듯하다. 내가 없을 때 오면 이 난장판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지. 나 (올 거면 지금 와 나 좀 있다가 나갈 거야) 누나 (아 왜 지금이야) 나 (지금 아니면 못 볼 거 같은데) 누나 (진짜 귀찮네 기다려 갈 테니까) 나 (ㅇㅇ 기다릴게) 누나 (오늘따라 좀 이상하네? 별일 없지?) 나 (아직은 없어) 누나 (ㅋㅋㅋㅋㅋㅋㅋ..
내가 모 회원제 리조트호텔에 근무했을 때 어느 노부부가 남긴 설문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일단 일반적으로 모든 회원들에게 받는 만족도 조사였습니다만, 마지막에 있는 [바라는 점]에 '충고'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충고. 저희가 묵은 7층의 000호실은 영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뒷면에 써두었으니 후에 굿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 방은 전부터 불만이 있는 방이었습니다. *누군가 창문으로 들여다보는 듯합니다. *베란다에서 무엇이 움직입니다. *욕실의 물이 마음대로 나옵니다. *짐이 어질러집니다. *밤에 귓가에 소리가 들립니다. 등의 이유로 평소에는 폐쇄된 방입니다. 우연히 성수기에 다른 호텔에서 연수 온 직원이 이중 예약을 해버려서 어쩔 수 없이 주임의 판단으로 그 방을 내어줬습니다. 뒷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