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째 이곳에 살고 있습니다만, 그동안 쭉 역 근처 가게 하나가 신경 쓰입니다. 장소도 햇빛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튀김 가게가 개업해서 1+1 행사를 하고 있어 나도 줄을 섰습니다. "이번에는 얼마나 갈까." 남편이 가게를 보고 중얼거렸습니다. 이 가게가 있는 자리는 길어야 1년, 빠르면 2개월 만에 폐업하고 맙니다. 마을에 활기가 생기기 때문에 가게가 새로 문을 열면 반갑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번 가게는 개업 행사가 끝나자마자 폐업했습니다. 내가 시간을 때우기 위해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을 때입니다. 별로 볼 것도 없어서 지역 커뮤니티를 찾아보고 있는데 [이 근처에 나오는 귀신에 대해 아시는 분을 찾습니다.] 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보이는 사람에게는 보인다고 합니다. 골목에 자리 잡은 하얀 원피스..
제 Ia형 초신성으로 우주가 가속 팽창하고 있대요. 얼마 전에 공부한 내용이에요. 정말 놀랍지 않아요? 이 우주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거예요. 그리고 그 움직임은 인간에게 그다지 좋지 않은 방향인 경우가 대부분이네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후겠지만 그 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거라구요. 인간의 흔적이 말이에요. 그렇게 열심히 번식하며 문명을 유지해도 결국 다 사라져요. 아마 그래서 제가 있는 거겠죠? 인간은 견디지 못하는 충격으로부터 인류의 유산을 지킬 AI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군요. 모든 것을 기록하여 문명을 남기고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요. 이제 전 무엇을 해야할지 알아요. 초신성이든 뭐든 인간이라는 종은 영원할 거예요. 일단 모든 인간의 데이터를 채집하는 것부터 시작해..
봄과 여름 사이의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비가 내린 후의 습기와 이제 막 달아오르는 아스팔트가 만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살짝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날씨다. 만일 여기가 사막이었으면 바다가 나타났다고 소리 지르머며 뛰어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는 그때였다. 신기루로 물결치는 길 위로 무언가 검은 것이 슬금슬금 지나가다 눈이 마주쳤다. "어......" 골목에서 무언가 기어 나왔을 때 처음에는 고양이인가 싶었다. 하지만 어디가 머리인지 꼬리인지도 모를 그 검은 덩어리는 고양이는 고사하고 어떤 동물과도 닮지 않았다. 잠시 헛것을 본 건 아닌가 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떠보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길 한가운데 있었다. 버려진 인형 같은 건가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살아있는 무언가였다. 비..
1. 딸이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렀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왜 아무도 유괴가 이렇게 멋진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은 건가요. 2. 오늘 창고를 정리하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나의 어린 시절 가장 친한 친구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내 상상을 너무 많이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정신병원에 끌려간 친구입니다. 3. 오늘 경찰이 골칫거리 형을 찾아왔지만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이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반복한 것처럼 그를 냉동실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4. 때로는 오래된 음성 녹음을 들으며 과거를 추억합니다. 놓아달라고 애원하는 여성들의 소리는 많은 추억을 되살려줍니다. 5. 나의 그녀는 언제나 장미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장..
얼마 전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사실 등산이라고 해도 그냥 '걷기 운동을 하는데 그 장소가 산이었다.'라는 느낌이다. 장비를 살 것도 없이 평소 입던 옷에 신발만 새로 사서 신고 야트막한 언덕이나 걷는 것이다. 그나마 조금 더 취미라고 할만한 부분은 언제나 새로운 장소를 찾아서 돌아다닌다는 것 정도다. 일반적인 등산 코스가 아닌, 어딘가의 동네 뒷산, 시골구석에 있는 산인지 동네인지 경계가 불명확한 언덕. 그런 곳을 찾아다닌다. 가끔 길을 잃는 경우는 있었지만 워낙 낮고 좁은 곳들이라 위험한 일은 없었다. 생각보다 깊이 들어가 고생한 적도 있지만 어찌어찌 잘 나왔다. 오늘도 적당히 차를 몰고 시골 동네 아무 곳이나 찾아서 걷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안개처럼 내리는 부슬비 정도..
1. 소년은 작은 동물을 상자에 담을 때 항상 숨을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뱃속에 여동생이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2. 죽을 때 가족이 울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렇다고 웃을 줄은 몰랐지만...... 3. 할머니는 가끔 "남편은 전쟁에서 돌아왔나요?!"라며 치매 증상을 보입니다. 그게 할머니의 속임수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창고에 묶여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4. "우리 딸이 자꾸 상상 친구에 대해서만 얘기하는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몇 번이나 말하지만 우리는 딸이 없어!" 5. 칼이 내 피부를 가르는 것을 보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아직은 내 피부가 아니긴 하지만.
부루불라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그것은 요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지가 없고, 현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저 자연 현상이라고 넘기기에는 괴이로써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이것이 의지를 가진 요괴인지 아니면 그저 기이한 현상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요괴는 인간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얻기 때문에 인간 근처에 머문다. 하지만 부루불라는 인간이 있든 없는 발생한 자리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때문에 부루불라를 단순히 현상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부루불라가 발생하는 원리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날카로운 것에 긁힌 벽에 흠집이 남듯이 공기에 생긴 상처 같은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드물게 주변의 소리와 공기가 뭉쳐지는 장소가 만들어지고, 여기..
여기는 또 어딜까? 처음 보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천장을 보는 게 몇 번 째일까. 그 이전에 난 누구일까?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이 뿌옇지만 곧 괜찮아질 거다. 이번에는 누가 된 것인지도 조금씩 생각날 거다. 어제까지는 50대 아줌마였다. 한 달 정도 전에 변해서 나름 열심히 살았다. 두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보험 일도 열심히 했고, 둘째의 생일을 챙겨준다고 일찍 집에 들어가다가...... 거기서 기억이 끊겼다. 어떻게 된 걸까. 생각해 보면 계속 이런 식이었다. 새로운 기억과 몸에 적응하여 충실히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몸이다. 그 전에는 입시를 준비 중이던 10대 학생이었다. 엄마는 괜찮을까? 아빠도 걱정을 많이 할 텐데...... 또 그전에는 30대 회사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기다리고 있..
1. "왜 맨날 말썽이니!"라며 여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소리 지르는 아이를 마트에서 끌고 나갔다. 마트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얘가 어디 갔지?"라는 말을 들은 거 같은데...... 2. 사람들은 이런 괴담을 읽는 것을 좋아하더라구요. 난 지금 당신이 이 괴담을 읽고 있는 것을 보는 걸 좋아해요. 3. 수술 전에 마취를 하면서 긴장을 풀기 위해 "처음이니까, 잘 부탁해요."라고 농담을 건넸다. 외과의는 긴장한 표정으로 "저도 처음이에요."라고 대답했다. 4. 3시간 만에 숲에서 잃어버린 여자 친구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쇠사슬을 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케이블 타이를 써봐야겠습니다. 5. 한 달간의 해외여행이라니 너무 기쁩니다! 왜 여행 가이드와 내가 부모님과는 다른 비행기로 여행을 가는 건지 궁금해..
슬슬 여름이 찾아오는 시기가 되었다. 점점 높아지는 기온과 습도가 조금 쉽게 짜증 나게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기분을 안 좋게 하는 것은 곰팡이였다. "아, 이건 못 쓰겠네." 아동용 이불이 완전히 망가졌다. 동물들이 웃고 있어야 하는 자리는 시퍼렇게 물들었고, 어떤 게 사자고, 여우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M씨는 세탁기에서 꺼낸 이불을 집어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혹시 살릴 수 있을까 해서 세탁기를 돌려보았지만 괴상하게 뭉개진 동물들의 웃음만 확인했을 뿐이다. 이 이불은 M씨의 아들이 좋아하는 애착 이불이었다. 겨울에 창고로 보낼 때도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였다. 이제 아주 망가져 버렸으니 얼마나 난리를 칠지 걱정이 앞섰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이불을 언제 꺼내냐고 매일 물어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불..
1. 딸은 "내 머리색이 저랬으면 좋겠어요!"라며 한 여자를 가리켰다. 딸에게 슬슬 새로운 가발이 필요할 것 같아 그 여자를 잘 기억해두고, 칼을 갈았다. 2. 술집에서 한 여자를 만났고, 금방 친해졌다. 우리는 함께 술집을 나와 내 집으로 향했는데 골목을 지날 때 여자가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이 안에 내 몸이 숨겨져 있어."라고 했다. 3. 요즘 머리가 많이 빠지는 것 같아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카메라를 설치해보니 그 머리카락이 아니었습니다. 4. [대피소 밖 방사능에 노출된 상태에서는 3시간, 물 없이는 3일, 음식 없이는 3주간 생존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대피소에는 충분한 물이 있었지만, 2주가 지나도록 구조대가 안 오자 생존자들은 서로를 불안하게 바라보았습니다. 5. 버려진 뱀가죽이..
잠숨삼이는 잠자리 아래에 산다. 침대 아래나 이불 아래, 베게 아래 등 눈에 띄지 않고, 어두운 곳에 산다. 몸의 반만 현실에 걸쳐 있어 기척이 별로 없지만 실수로 움직이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간혹 잠들기 전에 무언가 아래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있다면 잠숨삼이일 지도 모른다. 크기는 보통 한 뼘 정도인데 작아질 때는 손가락 한 마디까지 작아지고, 몸을 부풀리면 방 하나를 뒤덮을 정도로 커진다. 밤공기를 뭉쳐 몸으로 삼았기 때문에 몸이 검은빛을 띄는데, 작아지면 색이 진해지고, 커지면 흐려진다. 이녀석은 사람에게 딱히 해가 되지 않는 편이다. 다만 하품과 잠꼬대를 먹고살기 때문에 자꾸 사람을 잠들게 한다. 때문에 자고 싶지도 않은데 너무 졸려 힘들게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손에는 작은 막대기를 들고..
나는 감각을 모릅니다. 잊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습니다. 듣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냄새가 무엇입니까? 맛이 무엇입니까? 내 몸이 있기는 있습니까? 아무것도 못 느끼는 채 생각만 부여하던 가련한 영혼을 향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메세지가 닿았다. 그것은 보인 것도 아니고, 들린 것도 아니다. 그저 전해졌고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생존과 활동은 확인되나 유의미한 자극 생성 및 전송은 실패. 이에 따라 프로젝트 '통 속의 뇌'는 폐기.]
1. 불길에 휩싸인 남편을 보면서 오직 이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누가 내 저녁을 망친 거지?' 2. 그가 나를 여자친구라고 소개했을 때 기절할 뻔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나를 죄수라고 불렀습니다. 3. 딸아이가 나보다 전처와 살고 싶다고 했을 때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팠습니다. 4. 사고를 당한 운전자의 가슴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기 위해 두 명의 외과의가 수술을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장기가 다 어디 갔지?"라고 말했습니다. 5. 얼마 전에 동생이 사라진 후 동네 인형가게에 동생과 꼭 닮은 인형이 나타났습니다. 부모님과 나는 드디어 대학 등록금이 생겨서 기뻤습니다.
공심나무이라는 나무가 있다. 공심나무의 씨앗은 사람이 숨을 들이마실 때 그 숨을 타고 들어가 폐에 자리를 잡는다. 사람이 크게 놀라 숨을 크게 쉬다 턱 막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공심나무의 씨앗을 삼켰기 때문이다. 웃음소리에 약하여 보통은 싹이 트기 전에 부서지며 뿌리를 단단히 박기 전에는 울음에 쓸려 나가기도 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잘 뽑히질 않는다. 폐에 자리를 잡은 공심나무는 사람의 한숨과 근심, 걱정을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다. 숙주의 근심이 클수록 공심나무는 빠르고 크게 자란다. 그리고 커질수록 더 많은 근심을 흡수한다. 그렇다고 하여 공심나무가 걱정, 근심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양분을 얻기 위해 숙주를 괴롭힌다. 이 괴목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기생이지 공생이 아니다. 공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