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과 여름 사이의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였다. 비가 내린 후의 습기와 이제 막 달아오르는 아스팔트가 만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살짝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날씨다. 만일 여기가 사막이었으면 바다가 나타났다고 소리 지르머며 뛰어갔을지도 모르겠다고 실없는 생각을 하는 그때였다. 신기루로 물결치는 길 위로 무언가 검은 것이 슬금슬금 지나가다 눈이 마주쳤다. "어......" 골목에서 무언가 기어 나왔을 때 처음에는 고양이인가 싶었다. 하지만 어디가 머리인지 꼬리인지도 모를 그 검은 덩어리는 고양이는 고사하고 어떤 동물과도 닮지 않았다. 잠시 헛것을 본 건 아닌가 하여 눈을 질끈 감았다 떠보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길 한가운데 있었다. 버려진 인형 같은 건가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봐도 살아있는 무언가였다. 비..
1. 딸이 처음으로 '아빠'라고 불렀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왜 아무도 유괴가 이렇게 멋진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은 건가요. 2. 오늘 창고를 정리하다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나의 어린 시절 가장 친한 친구의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내 상상을 너무 많이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정신병원에 끌려간 친구입니다. 3. 오늘 경찰이 골칫거리 형을 찾아왔지만 이미 몇 번이나 경험한 일이기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몇 번이나 반복한 것처럼 그를 냉동실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4. 때로는 오래된 음성 녹음을 들으며 과거를 추억합니다. 놓아달라고 애원하는 여성들의 소리는 많은 추억을 되살려줍니다. 5. 나의 그녀는 언제나 장미를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장..
얼마 전부터 등산을 시작했다. 사실 등산이라고 해도 그냥 '걷기 운동을 하는데 그 장소가 산이었다.'라는 느낌이다. 장비를 살 것도 없이 평소 입던 옷에 신발만 새로 사서 신고 야트막한 언덕이나 걷는 것이다. 그나마 조금 더 취미라고 할만한 부분은 언제나 새로운 장소를 찾아서 돌아다닌다는 것 정도다. 일반적인 등산 코스가 아닌, 어딘가의 동네 뒷산, 시골구석에 있는 산인지 동네인지 경계가 불명확한 언덕. 그런 곳을 찾아다닌다. 가끔 길을 잃는 경우는 있었지만 워낙 낮고 좁은 곳들이라 위험한 일은 없었다. 생각보다 깊이 들어가 고생한 적도 있지만 어찌어찌 잘 나왔다. 오늘도 적당히 차를 몰고 시골 동네 아무 곳이나 찾아서 걷기 시작했다.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비가 오기 시작했지만 안개처럼 내리는 부슬비 정도..
1. 소년은 작은 동물을 상자에 담을 때 항상 숨을 쉴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뱃속에 여동생이 들어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습니다. 2. 죽을 때 가족이 울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렇다고 웃을 줄은 몰랐지만...... 3. 할머니는 가끔 "남편은 전쟁에서 돌아왔나요?!"라며 치매 증상을 보입니다. 그게 할머니의 속임수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창고에 묶여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4. "우리 딸이 자꾸 상상 친구에 대해서만 얘기하는데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몇 번이나 말하지만 우리는 딸이 없어!" 5. 칼이 내 피부를 가르는 것을 보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아직은 내 피부가 아니긴 하지만.
부루불라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그것은 요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지가 없고, 현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저 자연 현상이라고 넘기기에는 괴이로써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이것이 의지를 가진 요괴인지 아니면 그저 기이한 현상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요괴는 인간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얻기 때문에 인간 근처에 머문다. 하지만 부루불라는 인간이 있든 없는 발생한 자리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때문에 부루불라를 단순히 현상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부루불라가 발생하는 원리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날카로운 것에 긁힌 벽에 흠집이 남듯이 공기에 생긴 상처 같은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드물게 주변의 소리와 공기가 뭉쳐지는 장소가 만들어지고, 여기..
여기는 또 어딜까? 처음 보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천장을 보는 게 몇 번 째일까. 그 이전에 난 누구일까?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이 뿌옇지만 곧 괜찮아질 거다. 이번에는 누가 된 것인지도 조금씩 생각날 거다. 어제까지는 50대 아줌마였다. 한 달 정도 전에 변해서 나름 열심히 살았다. 두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보험 일도 열심히 했고, 둘째의 생일을 챙겨준다고 일찍 집에 들어가다가...... 거기서 기억이 끊겼다. 어떻게 된 걸까. 생각해 보면 계속 이런 식이었다. 새로운 기억과 몸에 적응하여 충실히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몸이다. 그 전에는 입시를 준비 중이던 10대 학생이었다. 엄마는 괜찮을까? 아빠도 걱정을 많이 할 텐데...... 또 그전에는 30대 회사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기다리고 있..
1. "왜 맨날 말썽이니!"라며 여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소리 지르는 아이를 마트에서 끌고 나갔다. 마트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얘가 어디 갔지?"라는 말을 들은 거 같은데...... 2. 사람들은 이런 괴담을 읽는 것을 좋아하더라구요. 난 지금 당신이 이 괴담을 읽고 있는 것을 보는 걸 좋아해요. 3. 수술 전에 마취를 하면서 긴장을 풀기 위해 "처음이니까, 잘 부탁해요."라고 농담을 건넸다. 외과의는 긴장한 표정으로 "저도 처음이에요."라고 대답했다. 4. 3시간 만에 숲에서 잃어버린 여자 친구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쇠사슬을 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케이블 타이를 써봐야겠습니다. 5. 한 달간의 해외여행이라니 너무 기쁩니다! 왜 여행 가이드와 내가 부모님과는 다른 비행기로 여행을 가는 건지 궁금해..
슬슬 여름이 찾아오는 시기가 되었다. 점점 높아지는 기온과 습도가 조금 쉽게 짜증 나게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기분을 안 좋게 하는 것은 곰팡이였다. "아, 이건 못 쓰겠네." 아동용 이불이 완전히 망가졌다. 동물들이 웃고 있어야 하는 자리는 시퍼렇게 물들었고, 어떤 게 사자고, 여우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M씨는 세탁기에서 꺼낸 이불을 집어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혹시 살릴 수 있을까 해서 세탁기를 돌려보았지만 괴상하게 뭉개진 동물들의 웃음만 확인했을 뿐이다. 이 이불은 M씨의 아들이 좋아하는 애착 이불이었다. 겨울에 창고로 보낼 때도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였다. 이제 아주 망가져 버렸으니 얼마나 난리를 칠지 걱정이 앞섰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이불을 언제 꺼내냐고 매일 물어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불..
1. 딸은 "내 머리색이 저랬으면 좋겠어요!"라며 한 여자를 가리켰다. 딸에게 슬슬 새로운 가발이 필요할 것 같아 그 여자를 잘 기억해두고, 칼을 갈았다. 2. 술집에서 한 여자를 만났고, 금방 친해졌다. 우리는 함께 술집을 나와 내 집으로 향했는데 골목을 지날 때 여자가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이 안에 내 몸이 숨겨져 있어."라고 했다. 3. 요즘 머리가 많이 빠지는 것 같아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카메라를 설치해보니 그 머리카락이 아니었습니다. 4. [대피소 밖 방사능에 노출된 상태에서는 3시간, 물 없이는 3일, 음식 없이는 3주간 생존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대피소에는 충분한 물이 있었지만, 2주가 지나도록 구조대가 안 오자 생존자들은 서로를 불안하게 바라보았습니다. 5. 버려진 뱀가죽이..
잠숨삼이는 잠자리 아래에 산다. 침대 아래나 이불 아래, 베게 아래 등 눈에 띄지 않고, 어두운 곳에 산다. 몸의 반만 현실에 걸쳐 있어 기척이 별로 없지만 실수로 움직이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간혹 잠들기 전에 무언가 아래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있다면 잠숨삼이일 지도 모른다. 크기는 보통 한 뼘 정도인데 작아질 때는 손가락 한 마디까지 작아지고, 몸을 부풀리면 방 하나를 뒤덮을 정도로 커진다. 밤공기를 뭉쳐 몸으로 삼았기 때문에 몸이 검은빛을 띄는데, 작아지면 색이 진해지고, 커지면 흐려진다. 이녀석은 사람에게 딱히 해가 되지 않는 편이다. 다만 하품과 잠꼬대를 먹고살기 때문에 자꾸 사람을 잠들게 한다. 때문에 자고 싶지도 않은데 너무 졸려 힘들게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손에는 작은 막대기를 들고..
나는 감각을 모릅니다. 잊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습니다. 듣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냄새가 무엇입니까? 맛이 무엇입니까? 내 몸이 있기는 있습니까? 아무것도 못 느끼는 채 생각만 부여하던 가련한 영혼을 향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메세지가 닿았다. 그것은 보인 것도 아니고, 들린 것도 아니다. 그저 전해졌고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생존과 활동은 확인되나 유의미한 자극 생성 및 전송은 실패. 이에 따라 프로젝트 '통 속의 뇌'는 폐기.]
1. 불길에 휩싸인 남편을 보면서 오직 이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누가 내 저녁을 망친 거지?' 2. 그가 나를 여자친구라고 소개했을 때 기절할 뻔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나를 죄수라고 불렀습니다. 3. 딸아이가 나보다 전처와 살고 싶다고 했을 때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팠습니다. 4. 사고를 당한 운전자의 가슴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기 위해 두 명의 외과의가 수술을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장기가 다 어디 갔지?"라고 말했습니다. 5. 얼마 전에 동생이 사라진 후 동네 인형가게에 동생과 꼭 닮은 인형이 나타났습니다. 부모님과 나는 드디어 대학 등록금이 생겨서 기뻤습니다.
공심나무이라는 나무가 있다. 공심나무의 씨앗은 사람이 숨을 들이마실 때 그 숨을 타고 들어가 폐에 자리를 잡는다. 사람이 크게 놀라 숨을 크게 쉬다 턱 막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공심나무의 씨앗을 삼켰기 때문이다. 웃음소리에 약하여 보통은 싹이 트기 전에 부서지며 뿌리를 단단히 박기 전에는 울음에 쓸려 나가기도 하지만 일단 자리를 잡으면 잘 뽑히질 않는다. 폐에 자리를 잡은 공심나무는 사람의 한숨과 근심, 걱정을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다. 숙주의 근심이 클수록 공심나무는 빠르고 크게 자란다. 그리고 커질수록 더 많은 근심을 흡수한다. 그렇다고 하여 공심나무가 걱정, 근심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양분을 얻기 위해 숙주를 괴롭힌다. 이 괴목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기생이지 공생이 아니다. 공심..
노예 (奴隷) 1 남의 소유물로 되어 부림을 당하는 사람. 모든 권리와 생산 수단을 빼앗기고, 물건처럼 사고팔리던 노예제 사회의 피지배 계급이다. 2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권리나 자유를 빼앗겨 자기 의사나 행동을 주장하지 못하고 남에게 사역(使役)되는 사람. 3 인격의 존엄성마저 저버리면서까지 어떤 목적에 얽매인 사람.재물의 노예. 현대에 들어서 법적으로 노예는 사라졌다. 지금에 와서 노예라고 하면 보통 세번째 의미로 많이 사용된다. 돈의 노예, 사랑의 노예, 성공의 노예 등등...... 그런데 두번째 의미의 노예. 진짜 노예가 현대에도 존재하고 있다. 사회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K군은 취직도 힘든데 어떻게하면 돈을 벌 수 있을까 고민하다 이런 공고를 본다. [PC방 공동창업 사업주 모집] 취직..
1. 목매단 딸을 발견했다. 또. 2. 소년은 "제 암이 사라졌으면 좋겠어요."라고 소원을 빌었다. 천사는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의 소원을 취소시킬 수는 없어."라고 대답했다. 3. 남편이 나에게 잠꼬대가 심하다고 합니다. 난 지금까지 남편이 잠꼬대를 하는 줄 알았는데...... 4. 나는 정신병으로 발작을 일으켜 가족들을 죽였고, 그 때문에 정신병원에 갇혔습니다. 이제 치료가 끝나고 나왔으니 홀로 남은 여동생을 찾아가 마무리를 지어야겠습니다. 5. 그녀의 한 마디가 그의 심장을 울렸습니다. "맛있어."라고 그녀는 계속 씹으며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