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렸을 때의 일이다. 열 살? 아니, 그보다는 더 컸었던 것 같다. 어느날 밤 아버지께서 집 밖으로 나가셨다. 어지간하면 늦은 시간에는 잘 나가지 않는 분이라 무슨 일인가 싶어 조금 놀랐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친구분이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장례식을 가는 것이라고. 오늘은 아마 거기서 주무시고 오실 거라고 하셨다. 집이라는 공간에 가족의 구성원 중 한 명이 비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닌 일인데 그 때는 그 빈자리가 낯설고 어색했다. 무언가 크게 부족하고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돌아오셨다. 드디어 빈자리가 채워져 기분이 좋아졌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편치 않아 보였다. 친한 친구가 떠난 것이니 그 슬픔이 ..
[띵동] 시간이 충분했기에 여유롭게 초인종을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띵동띵동]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꾸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집에 있을 텐데? 보통은 2, 3번만 초인종을 눌러도 나올 텐데…… 불안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밖에 서 있어도 되는 걸까? 지금이라도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손바닥에 땀이 차고 호흡이 불안정해질 때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거기서 뭐 해요?” “응?” 아내였다. 아내가 옆집에서 문을 열고 나와서 황당하다는 듯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여기……” “바보 같기는… 그 집이 아니잖아요.”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이 집에 들어온 후 주변 집들을 하나씩 방문 중이다. 그리고 어제는 옆집에도 방문했었다. 민..
흙냄새가 났다. 술에 취한 탓에 착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잠이 덜 깨서 꿈속을 헤매는 건지 몰라도 어릴 때 맡던 그 냄새가 났다. 시골 사는 사람에게 흙냄새는 공기의 냄새와 다르지 않다. 새벽같이 밖으로 나서면 눅눅하게 물기를 먹은 흙냄새가 코 끝을 스치고, 밭이든 논이든 가기만 하면 풀 냄새 섞인 흙냄새가 다가온다. 한발 내딛으면 흙이고, 물러서도 흙이니 오히려 흙냄새를 잘 몰랐다. 흙냄새가 그렇게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서울에 온 후였다. 정확히는 서울 생활을 하다 다시 시골을 갔을 때였다. 그전까지는 몰랐던 흙냄새가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냄새가 슬며시 코를 간질였다. 지금은 날 리 없는 그런 냄새였다. 아마도 꿈속에서 시골이라도 다녀온 걸까 싶었다. “어? 일어났냐?” 함께 ..
전 세계에서 단 사람에게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모두가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아우성칠 거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누군가 다치거나, 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되고 보니 생각보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소원을 빌고 싶었지만 그 욕심만큼이나 서로를 겨눈 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세계 정상들이 회의를 하고 또 한 끝에 소원을 빌 수 있는 권한을 만 10세 이하 아이 중에 추첨하여 주기로 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비는 소원은 그나마 어른들의 욕망에 비해 안전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물론 만 10세의 기준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그 역시 어렵지 않게 타협했다. 각자의 출생신고일을 기준으로 삼고..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그럭저럭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공간이었지. 다른 특징으로는…… 사방이 온통 붉은색이었어. 좁고, 온통 붉기만 한 공간은 오래 머물기에 쾌적한 곳은 아니지. 왜 갇혀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오지도 않는 상태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 별 수 있어? 탈출해야지. 그나마 팔다리 움직일 정도 공간은 있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당겼어. 손톱으로 긁어도 보고, 하다 안 돼서 물어뜯기도 했지. 그나마 물어뜯는게 정답이었는지 조금씩 틈이 생기더라. 틈으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고 쥐어뜯고 또 물고…… 겨우겨우 탈출했단 말이야. 그랬더니 밖에 사람이 잔뜩 있는 거야! 너무 하..
학교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다. 텅 빈 공간은 생각보다 공기가 무겁고, 작은 발소리도 너무 크게 돌아온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나지는 않지만 슬슬 나갈 때였다. 시골 학교는 생각보다 넓다. 사람이 적은 탓도 있지만, 부지를 넓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건물 사이에 쓸데없는 공간도 많다. 체육관을 나오면 건물로 삼면이 둘러싸인 넓은 공터가 나온다. 왜 이런 공간이 필요한 걸까. 그나마 여기에는 사람이 좀 있었다. 선생님과 친구들 몇 명. “선생님, 저기 뭐가 있어요.” 누가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두의 시선이 거기로 향했다. 꽤 먼 곳에. 정말로 뭔가가 있었다. 사람. 혹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뭐지? 선생님이 보고 올게.” 다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선생님이 대표로 나섰다. “근데..
얼마 전, C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해서 겉으로 몸이 좋은 것이 티나는 친구였는데,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어지간히 취한 손님이 아니면 시비 걸리는 일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언제나 당당했고, 무서움을 모르고 다녔다. C가 일하는 편의점은 사거리에 있었는데 좀 오래된 건물이라 화장실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편의점을 나와 조금 떨어진 노래방 건물을 가야 했는데 이상하게 사장님에게 받은 열쇠가 맞지 않았다고 한다. 별 수 없이 참았다가 집에 가서 해결하고는 했는데, 정 급할 때는 길 건너 맞은 편에 있는 빵집에 가서 화장실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루는 정말 참기가 힘들어서 빵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 빵집도 오래된 건물..
중학생이던 I는 하굣길에 메시지를 받았다. [엄마 : 아빠랑 장례식장 다녀올 테니까 문단속 잘 하고 집 잘 보고 있어] [엄마 : 내일 올 거니까 밥 챙겨 먹고]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I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자!” “뭐야? 뭐 좋은 일 있어?” “엄마, 아빠 오늘 집에 없대. 내일 온대.” 그렇다는 것은 오늘 하루 편하게 놀아도 된다는 말이다. 밥도 먹고 싶은 대로, 자는 것도 마음대로, 뭘 하고 놀든 마음대로다. 단 하루지만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I는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부모님의 잔소리에 잘 준비를 해야겠지만 오늘은 그런 필요가 없다. 하지만 딱히 재미있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할 게 많지 않았다. “아, 심심하네.” 게..
요즘은 어려운 일,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 할 필요가 없다. T는 일단 시작한 일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지둥하다 결국 스마트폰을 들었다. 동호회 앱에서 [서바이벌 캠핑] 탭에 들어가 글을 썼다. [전에 여기서 본 팁대로 해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고수님들 도와주세요 ㅠㅠ] 자신이 봤던 서바이벌 팁의 링크를 걸고, 현재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서 첨부했다. 답변은 생각보다 금방 왔다. [마침 제가 근처네요. 상세 위치 찍어주세요. 지금 갑니다.] 마침 근처에 고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캠핑장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이렇게 빠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몰라 T는 조금 불안했다. 이렇게 너저분하게 어질러 놓은 상태에서 누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E는 이 근처에서 제법 유명한 바텐더다. 우선 미인에, 화술도 좋지만 정말 잘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칵테일을 정말 잘 만들었다. 다들 그녀에게 재능이 있다고 했고, 그녀의 칵테일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똑같이 대답했다. “재능은요, 무슨. 그냥 섞기만 하는 건데요.” 많은 사람들이 겸손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건방지다고 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질투하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다. “무시하기나 하고 말이야.” C는 칵테일을 정말 좋아했다. 마시는 것도 좋아했고, 스스로 만드는 것도 좋아했다. 그런 C에게 칵테일을 ‘그냥 섞는 것’이라 평가하는 E의 말은 너무 거슬리는 것이었다. 정말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아무리 연구하여 만든 레시피도 E가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
해결 방법이 없는 갈등은 없다. 물론 힘든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해결은 된다. 정 방법이 보이지 않고 과정이 너무 힘들면 아예 갈등을 회피하는 방법도 있다. 서로 보지 않으면 갈등이 일어나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회피조차 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이 사는 사이라면, 매일 봐야 하는 사이라면, 떨어져 살 수 없는 사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갈등을 해결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한 쪽이 참고 살아야 할 것이다. 서로 참기 힘들고, 참기 싫겠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래야 한다. 스트레스다. 공포다. 미쳐버릴 것 같은 삶이다. 왜 내가 참고 살아야 하고, 왜 저 얼굴을, 저 행동을 참아 넘겨야 한다는 건가. 굳이 그래야 하나? 정말 갈등의 해결 방법은 ..
D에게는 최근 고민이 생겼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고민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선 D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D가 살고 있는 집은 반지하로 상당히 넓은 편이고, 위치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보증금은 주변 지역의 반 정도로 상당히 저렴한 편이라 신이 나서 들어와 사는 중이다. 보증금이 저렴한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가끔 들려온다. 무언가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긁는 소리. 그리고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그리고 몇 번이나 입주민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짜로 이상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가끔은 한밤중에, 가끔은 낮에도. 그렇지만 워낙 저렴한 집이라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무섭기는 해도 항상 들..
요즘은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실패만 하고, 잘 풀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분명 처음에 분위기가 좋았다가도 어느 사이에 보면 모든 것이 망가져 있습니다. 이쯤 되면 세상이 저를 부정하는 느낌입니다. 그냥 망가질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괜한 생각이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업무를 위해 몇 번이나 백업해둔 파일이 오류가 나서 못 쓰게 되지를 않나.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돌아온 날 갑자기 도어록 건전지가 방전돼서 집에 못 들어가지를 않나. 한 번은 택시를 타고 잠깐 졸았더니 그 사이 요금이 두 배가 넘게 나왔습니다. 사소한 것들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서 마시려고 보면 종이컵에 뭐가 들어 있어서 버려야 하고. 집에서 나오는 길에 병을 밟고..
16살 때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몇 개월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입원한 병실은 4인실인데 거기에는 또래의 여자가 3명이 입원해 있었습니다. 1인실이 아닌 것에 실망했지만 비슷한 나이의 환자들이 있어서 나름 즐거운 입원 생활을 보냈습니다.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 같은 병원의 A와 B가 퇴원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와 C는 창가의 침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C와 함께 뭔가 좀 쓸쓸해졌다는 얘기를 하다 잠들었는데,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 깨버렸습니다. 어디선가 무언가 딱딱한 물체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혹시 C가 무언가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침대 칸막이 커튼을 열어봤지만 분명 자고 있었습니다. 이상했지만 나도 굉장히 졸렸기 때문에 그대로 잠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 꽤 큰 화상을 입었다. 집에 불이 났었다고 하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너무 큰 충격이라 기억이 지워졌을 거라고 상담 선생님은 말했다. 실제로 온 가족이 죽을 뻔한 사건이라고 뉴스에도 나올 정도였다. 혹시나 싶어서 그날 뉴스를 다시 보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저게 내 집이었지 참. 저기쯤이 내 방이었나? 아닌가? 어디더라? 잘 모르겠다. 오른쪽 어깨에 있는 일그러진 흉터만이 내가 화재 현상에 있었다는 증거였다. 덕분에 오른팔을 잘 쓰지 못하는 달갑지 않은 흉터다. 항상 붙어 다니는 트라우마. 분명히 내 몸이지만 너무 낯선 덩어리. 그래도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되었다. 꽤 오랜 시간 흉터가 뜨겁게 느껴지고, 뒤틀리는 아픔이 느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