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다. 텅 빈 공간은 생각보다 공기가 무겁고, 작은 발소리도 너무 크게 돌아온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생각나지는 않지만 슬슬 나갈 때였다. 시골 학교는 생각보다 넓다. 사람이 적은 탓도 있지만, 부지를 넓게 쓸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 건물 사이에 쓸데없는 공간도 많다. 체육관을 나오면 건물로 삼면이 둘러싸인 넓은 공터가 나온다. 왜 이런 공간이 필요한 걸까. 그나마 여기에는 사람이 좀 있었다. 선생님과 친구들 몇 명. “선생님, 저기 뭐가 있어요.” 누가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모두의 시선이 거기로 향했다. 꽤 먼 곳에. 정말로 뭔가가 있었다. 사람. 혹은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뭐지? 선생님이 보고 올게.” 다들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선생님이 대표로 나섰다. “근데..
얼마 전, C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평소 운동을 많이 해서 겉으로 몸이 좋은 것이 티나는 친구였는데,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어지간히 취한 손님이 아니면 시비 걸리는 일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언제나 당당했고, 무서움을 모르고 다녔다. C가 일하는 편의점은 사거리에 있었는데 좀 오래된 건물이라 화장실이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면 편의점을 나와 조금 떨어진 노래방 건물을 가야 했는데 이상하게 사장님에게 받은 열쇠가 맞지 않았다고 한다. 별 수 없이 참았다가 집에 가서 해결하고는 했는데, 정 급할 때는 길 건너 맞은 편에 있는 빵집에 가서 화장실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루는 정말 참기가 힘들어서 빵집을 찾아갔다. 그런데 이 빵집도 오래된 건물..
중학생이던 I는 하굣길에 메시지를 받았다. [엄마 : 아빠랑 장례식장 다녀올 테니까 문단속 잘 하고 집 잘 보고 있어] [엄마 : 내일 올 거니까 밥 챙겨 먹고]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I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자!” “뭐야? 뭐 좋은 일 있어?” “엄마, 아빠 오늘 집에 없대. 내일 온대.” 그렇다는 것은 오늘 하루 편하게 놀아도 된다는 말이다. 밥도 먹고 싶은 대로, 자는 것도 마음대로, 뭘 하고 놀든 마음대로다. 단 하루지만 완전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새벽 1시가 넘은 시간. I는 침대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부모님의 잔소리에 잘 준비를 해야겠지만 오늘은 그런 필요가 없다. 하지만 딱히 재미있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할 게 많지 않았다. “아, 심심하네.” 게..
요즘은 어려운 일, 힘든 일이 있을 때 혼자 할 필요가 없다. T는 일단 시작한 일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를 몰라 허둥지둥하다 결국 스마트폰을 들었다. 동호회 앱에서 [서바이벌 캠핑] 탭에 들어가 글을 썼다. [전에 여기서 본 팁대로 해봤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고수님들 도와주세요 ㅠㅠ] 자신이 봤던 서바이벌 팁의 링크를 걸고, 현재 상황을 사진으로 찍어서 첨부했다. 답변은 생각보다 금방 왔다. [마침 제가 근처네요. 상세 위치 찍어주세요. 지금 갑니다.] 마침 근처에 고수가 있었던 모양이다. 캠핑장이 한두 군데가 아닌데 이렇게 빠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몰라 T는 조금 불안했다. 이렇게 너저분하게 어질러 놓은 상태에서 누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E는 이 근처에서 제법 유명한 바텐더다. 우선 미인에, 화술도 좋지만 정말 잘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그녀는 칵테일을 정말 잘 만들었다. 다들 그녀에게 재능이 있다고 했고, 그녀의 칵테일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똑같이 대답했다. “재능은요, 무슨. 그냥 섞기만 하는 건데요.” 많은 사람들이 겸손하다고 했고, 누군가는 건방지다고 했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질투하기도 했고, 화를 내기도 했다. “무시하기나 하고 말이야.” C는 칵테일을 정말 좋아했다. 마시는 것도 좋아했고, 스스로 만드는 것도 좋아했다. 그런 C에게 칵테일을 ‘그냥 섞는 것’이라 평가하는 E의 말은 너무 거슬리는 것이었다. 정말 화가 나는 것은 자신이 아무리 연구하여 만든 레시피도 E가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었다..
멍잽이는 허공을 떠다니는 작은 벌레다. 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날개도 없이 그저 둥실둥실 떠다닐 뿐이다. 이렇게 떠다닐 때는 무게도 거의 없어 부딪히기도 전에 사람의 기운에 밀려나 접촉할 일이 없다. 평소에는 잠을 자고 있을 뿐 주변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또한 의태를 통해 몸을 숨기고 있는 탓에 제법 많은 수의 멍잽이가 떠다니지만 실제로 보는 경우는 드물다. 혹시 보이더라도 하루살이 같은 날벌레와 착각하고 넘기는 경우가 많다. 멍잽이가 잠을 자는 것은 몸을 숨기고, 띄우는 데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힘을 아끼기 위해 잠을 자는 것이다. 물론 자는 동안은 먹지를 못하여 에너지가 꾸준히 소모만 되는 문제가 있다. 하지만 멍쟁이의 꼬리에는 영양분을 저장하는 주머니..
해결 방법이 없는 갈등은 없다. 물론 힘든 경우가 없지는 않겠지만 어떻게든 해결은 된다. 정 방법이 보이지 않고 과정이 너무 힘들면 아예 갈등을 회피하는 방법도 있다. 서로 보지 않으면 갈등이 일어나지도 않으니까. 하지만 회피조차 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같이 사는 사이라면, 매일 봐야 하는 사이라면, 떨어져 살 수 없는 사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갈등을 해결할 수도 없고, 회피할 수도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한 쪽이 참고 살아야 할 것이다. 서로 참기 힘들고, 참기 싫겠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래야 한다. 스트레스다. 공포다. 미쳐버릴 것 같은 삶이다. 왜 내가 참고 살아야 하고, 왜 저 얼굴을, 저 행동을 참아 넘겨야 한다는 건가. 굳이 그래야 하나? 정말 갈등의 해결 방법은 ..
D에게는 최근 고민이 생겼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고민에 대해 이해하려면 우선 D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D가 살고 있는 집은 반지하로 상당히 넓은 편이고, 위치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보증금은 주변 지역의 반 정도로 상당히 저렴한 편이라 신이 나서 들어와 사는 중이다. 보증금이 저렴한 이유는 별거 아니었다. 가끔 들려온다. 무언가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긁는 소리. 그리고 뭐라고 말하는 소리가. 그리고 몇 번이나 입주민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짜로 이상한 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가끔은 한밤중에, 가끔은 낮에도. 그렇지만 워낙 저렴한 집이라 나가고 싶지는 않았다. 무섭기는 해도 항상 들..
요즘은 부정적인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실패만 하고, 잘 풀리는 경우가 없습니다. 분명 처음에 분위기가 좋았다가도 어느 사이에 보면 모든 것이 망가져 있습니다. 이쯤 되면 세상이 저를 부정하는 느낌입니다. 그냥 망가질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괜한 생각이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업무를 위해 몇 번이나 백업해둔 파일이 오류가 나서 못 쓰게 되지를 않나. 늦게까지 야근을 하고 돌아온 날 갑자기 도어록 건전지가 방전돼서 집에 못 들어가지를 않나. 한 번은 택시를 타고 잠깐 졸았더니 그 사이 요금이 두 배가 넘게 나왔습니다. 사소한 것들부터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서 마시려고 보면 종이컵에 뭐가 들어 있어서 버려야 하고. 집에서 나오는 길에 병을 밟고..
16살 때 교통사고로 오른쪽 다리가 부러져 몇 개월 입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입원한 병실은 4인실인데 거기에는 또래의 여자가 3명이 입원해 있었습니다. 1인실이 아닌 것에 실망했지만 비슷한 나이의 환자들이 있어서 나름 즐거운 입원 생활을 보냈습니다. 2주 정도가 지났을 무렵, 같은 병원의 A와 B가 퇴원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와 C는 창가의 침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C와 함께 뭔가 좀 쓸쓸해졌다는 얘기를 하다 잠들었는데, 밤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 깨버렸습니다. 어디선가 무언가 딱딱한 물체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혹시 C가 무언가 하고 있는 건가 싶어서 침대 칸막이 커튼을 열어봤지만 분명 자고 있었습니다. 이상했지만 나도 굉장히 졸렸기 때문에 그대로 잠들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어릴 때 꽤 큰 화상을 입었다. 집에 불이 났었다고 하는데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아마 너무 큰 충격이라 기억이 지워졌을 거라고 상담 선생님은 말했다. 실제로 온 가족이 죽을 뻔한 사건이라고 뉴스에도 나올 정도였다. 혹시나 싶어서 그날 뉴스를 다시 보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지만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저게 내 집이었지 참. 저기쯤이 내 방이었나? 아닌가? 어디더라? 잘 모르겠다. 오른쪽 어깨에 있는 일그러진 흉터만이 내가 화재 현상에 있었다는 증거였다. 덕분에 오른팔을 잘 쓰지 못하는 달갑지 않은 흉터다. 항상 붙어 다니는 트라우마. 분명히 내 몸이지만 너무 낯선 덩어리. 그래도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되었다. 꽤 오랜 시간 흉터가 뜨겁게 느껴지고, 뒤틀리는 아픔이 느껴지기도 했다..
친한 친구들과 함께 여름 바다에 놀러 갔을 대의 이야기입니다. 처음에는 모두 들뜬 상태로 해변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이, "저기에서 뛰어내리는 건 어때?" 라며 높지 않은 절벽을 가리켰습니다. 그 해변은 작은 절벽이 있었고, 다이빙을 하기에 좋은 장소였습니다. 높이가 낮기도 했고, 어렸을 때도 물에 뛰어들며 노는 것은 자주 했으니까 모두 찬성했습니다. 오랜만에 바다에 와서 텐션이 올라 그대로 절벽으로 달려갔습니다. 한 명이 좋은 카메라를 가져왔기 때문에 모두 재미있는 포즈로 다이빙을 하고 놀았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어? N은 어디 갔어?" 누군가 말을 했을 때서야 다들 눈치 했습니다. 어느새 N이 사라진 것입니다. 모두 해변을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했고, 해변 안전요원에게 말해서 같이 찾아..
1.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추궁하자 그녀는 사고였다며 울었다. 하지만 난 분명 그녀가 일부러 계단에 자기 몸을 던지는 것을 보았다. 2.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자신이 꼼짝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고,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이미 매장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녀의 눈에는 열심히 삽질을 하는 남편과 여동생이 보였고, 도대체 언제부터 둘이 친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3. "저기... 당신 여동생이 분명 뒷마당에 있다고 한 거 같은데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고." "파봤어요?" 4. 그녀의 차가운 미소가 나를 반겼다. 이 냉장고는 놀라울 정도로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잘 보존해 주고 있습니다. 5. 교회의 종소리를 들었을 때 나를 두렵게 한 것은 시간이 벌써 자정이라는 것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없는 숲 한가운데 나 혼자였다는..
1. 점에서 익사할 운명이라는 결과가 나와 그 후로는 물놀이를 가지 않습니다. 계단 아래서 피조차 뱉거나 삼키지 못한 상태가 되어보니 내 피에도 익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 예언가는 다음 주에 세상을 덮치는 재앙을 알았다. 하지만 말해봐야 바뀌는 것은 없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3. 간호사는 피를 조금 뽑을 뿐이니 별로 아프지 않을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조금 아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프지 않고...... 다른 감각도 점점 느껴지지 않았다. 4. 아마 저는 외과의가 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좀 더 연습하면 병원에서도 받아주지 않을까요? 5. 언니는 정말 숨바꼭질을 잘 해. 덕분에 10년이 지나도록 아무도 언니의 시체를 못 찾고 있잖아.
1. 아이들을 데리고 이사를 하는 것은 정말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려가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묻어둔 채 가야 할지 고민입니다. 2. 매년 우리는 5명이 모이는 날이면 숨바꼭질을 하는데 올해는 4명만 왔습니다. 그러다 작년 숨바꼭질 챔피언을 찾았는데 여전히 작년에 숨었던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3. 매일 밤 새벽 3시쯤이면 누군가 그녀의 방문을 열려고 합니다. 2시 59분이 됐을 때 오늘은 문을 잠그지 않은 것이 기억났습니다. 4. 관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웃으며 소각로를 켰다. 5. 나는 "과학자들이 식인종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는데 인간은 돼지고기랑 비슷한 맛이 난데."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는 "난 송아지 고기랑 더 비슷한 것 같은데?"라며 스테이크를 한 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