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이 죽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 몇 년 되지 않았는데 이제 동생마저 죽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과 보험금으로 살 집을 마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작지만 여자 둘이 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집이었다. 힘들지만 그래도 살았다. 슬퍼도 살았다. 그런데 이제 좀 잊고 살만 해지니까 동생이 부모님 곁으로 갔다. 급사? 과로사?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동생에게 병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 동생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다들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동생은 어지럽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들기 전까지 툭하면 어지럽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건강한 모습이라서. 힘든 일도 척척해내고 쉴 때 쉬는 요령 있는 아이라서..
초등학생일 때 학교 앞에는 문방구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조금 크고 세련된 곳이었는데 조금 좋아 보이는 볼펜이나 공책 같은 것들을 팔고 있었다. 형광펜도 그냥 편의점에서 파는 것보다 2배는 더 비싼 것들도 있어서 가끔 그런 것을 사온 아이들이 자랑을 하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굉장히 작은 구멍가게였다. 겉에서 보기에도 작은 가게였는데 안에 들어가 보면 물건이 꽉 차 있어서 쉽게 돌아다니기도 어려웠다. 먼지도 많고, 물건들에 가려져서 어둡기도 한 그런 가게였다. 주인아저씨도 항상 말이 없고, 손에는 큰 흉터도 있어서 아이들은 그 구멍가게를 무서워했다. 하지만 그래도 장사가 됐던 것은 그 가게에서만 파는 장난감이나 간식거리가 많았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찾을 수 없고 유독 거기에만 있는 것들이 있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었다. 살려달라는 힘없는 외침과 절박한 표정, 피가 엉긴 손, 꺼져가는 눈동자. 천천히 죽어가는 그 여자를 끝까지 지켜보며 있었던 자신. 그 모습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자연히 생활은 엉망이 되었고, 툭하면 잠에서 깨기 십상이었다. 고통의 나날. 이런 삶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살인자에게 어울리는 그런 삶이었다. 하지만 참았다. 고통스럽지만 그 이상으로 두려웠으니까.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그는 성당을 찾았다. 이제 그만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자신의 죄가 있긴 하지만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저의 죄를 고백하고자 합..
원룸촌 근처 편의점에서 일하다 보면 정말 온갖 사람들을 다 볼 수 있다. 생각보다 진상은 적지만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잔뜩 있는 게 원룸촌이다. 속옷 위에 대충 롱 패딩만 걸치고 오는 손님. 사는 것도 없으면서 기웃기웃 매장 안을 살피기만 10분 이상 하는 손님. 꼭 식사시간에 와서 사람 쉬지 못하게 하고 라면 냄새 풍기는 손님. 매장 문 앞에서 담배 피는 손님. 일반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를 꼭 반대로 버리는 손님. 등등. 항상 고정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고정적으로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그래도 역 앞이나 술집 근처, 아파트 단지 근처 편의점의 사연을 들어보면 그것보다는 낫다 싶긴 하다. 워낙 오는 손님만 오다 보니 대충 뭘 살지, 뭘 할지 예상이 되는 것도 좋은 점이다. 그..
견과류를 맛있게 먹는 방법 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바로 테이블을 채울 만큼 많은 견과류를 와르르 쏟아놓고 취향껏, 양껏 먹는 것이다. 촤르르르 소리와 함께 캐슈넛이 쏟아진다. 엄마와 함께 먹기에 양이 너무 많았지만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향기가 침을 고이게 하고, 눈앞을 가득 채운 듯한 그 모습에 행복할 뿐이었다. 하나를 집어먹어보면 오독오독 씹히는 그 식감과 입안 가득 고소한 맛이 돌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작게 한 줌을 모아 들어 한 입에 대여섯 개를 집어넣으면 꽉 채워진 그 느낌이 알 수 없는 만족감을 주었다. 반으로 툭 쪼개 맨들맨들한 안쪽을 가만히 느끼며 혀를 굴리다 천천히 깨물면 그 식감이 또 그렇게 재미있었다. 엄마도 하나 둘 캐슈..
비가 많이 오던 어느 여름 장마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흙바닥 놀이터가 별로 없지만 어릴 때만 해도 놀이터는 당연하다는 듯이 흙바닥, 모래바닥이었다. 아이들이 헤집으며 노는 놀이터에는 비가 오면 여기저기 물웅덩이가 생긴다. 물웅덩이가 생기면 또 그 물을 가지고 놀고, 물을 흘러가게 하면서 놀고, 흙을 매우면서 놀았다. 비가 많이 온 다음 날이었다. 놀이터에는 전에 없이 큰 물웅덩이가 생겨 있었고, 이미 많은 아이들이 모여 그 물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아이들 손으로 두 뼘, 깊이도 손등이나 겨우 잠기려나 싶은 물웅덩이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욕조처럼 넓고 손목이 다 잠길만한 물웅덩이가 생긴 것이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이 작은 호수를 꾸미고 놀았다. 한참을 놀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주변..
세상의 어딘가에서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 외계 생명체들이 침입하고 있다. 그 외계 생명체들은 크고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어지간한 도시를 초토화 시킬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 극소수의 일부만 그것을 알고 대비할 뿐이다. 그리고 마법소녀 리-제네레이션도 그중 일부다. 아니 일부였다. 지구에는 많은 히어로들이 존재하고 각자 다양한 개성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몸에서 불을 뿜거나 물이 될 수 있거나 순간이동을 하거나 하는 등의 능력들이다. 그중에는 외계 생명체와 싸울 수 있는 능력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있다. 소녀의 능력은 후자였다. 마녀의 힘을 계승한 소녀가 가진 힘은 재생이었다. 어떤 상처를 입어도 순식간에 나아버렸다. 아니 상처가 낫는 정도가..
바람개비는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장난감이다. 가위로 종이를 오려 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재주가 좋은 아이들은 몇 장의 종이를 접어 가위질도 없이 커다란 바람개비를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그런 재주가 없었다. 종이를 오리는 것도, 접는 것도 모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다. 몇몇 아이들이 새로운 바람개비를 들고 와 놀았다. 색색의 색종이들이 빙글빙글 돌며 햇빛에 반짝거렸다. 한가로운 바람에, 달리는 아이들의 서슬에, 인내심 부족한 아이의 날숨에 바람개비가 돌아간다. 날씨는 맑고, 주변에 시끄러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논둑길 어딘가. 심심했던 아이들이 변덕스럽게 만든 바람개비를 들고 나와 노는 모습을 아이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들지 않은 빈손을 들어 ..
안개고래 안개고래는 안개를 몰고 다니는 괴이다. 그 자신도 거대한 안개 덩어리기 때문에 그 실체를 정확히 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저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지고 그 안에서도 무언가 느낌이 다른, 무거운 느낌의 안개 속으로 들어서면 안개고래의 몸속으로 들어왔구나 하고 생각할 뿐이다. 이름처럼 고래와 유사한 형태와 크기를 가지고 있는데 주로 바다 위를 떠다닌다. 워낙 커서 한눈에 다 담기는 쉽지 않지만 바닷가 근처 산 위에서 보면 대략적인 형태를 볼 수 있다. 물론 안개를 두르고 있어 안개고래 자체를 볼 수는 없고 안개가 짙고 옅음을 통해 윤곽을 확인할 뿐이다. 안개고래는 특별히 해를 끼치거나 악의를 가진 괴이는 아니다. 그저 안개를 몰고 다닐 뿐이다. 하지만 짙은 안개로 인해 배가 길을 잃게 되거나 사고가 유..
아지랑이 숙녀 아지랑이 숙녀는 연기 여인, 신기루 소녀 등이라 불리기도 한다. 짙은 그늘이나 땅거미 진 공터, 안개 아래 등을 배회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간혹 밝은 곳에서 목격되기도 한다. 어떤 조건에 의해 그렇게 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언제나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그 실체를 정확히 본 사람은 없다. 다만 목격담을 모아보면 어두운 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허연 것이 날리며 솟아오르더니 거뭇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키고 이쪽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머리카락인지 옷인지 모를 것을 몸에 걸쳐 정확하지는 않으나 그 윤곽은 분명 여성의 것이라는 게 공통된 진술이다. 아지랑이 숙녀는 특별히 해를 끼치거나 악의 어린 장난을 치는 괴이는 아니다. 하지만 그 존재 자체가 사람의 시선을 어지럽히는 면이 ..
아직 어렸을 때의 일이다. 열 살? 아니, 그보다는 더 컸었던 것 같다. 어느날 밤 아버지께서 집 밖으로 나가셨다. 어지간하면 늦은 시간에는 잘 나가지 않는 분이라 무슨 일인가 싶어 조금 놀랐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친구분이 돌아가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장례식을 가는 것이라고. 오늘은 아마 거기서 주무시고 오실 거라고 하셨다. 집이라는 공간에 가족의 구성원 중 한 명이 비는 것은 생각보다 무서운 일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거 아닌 일인데 그 때는 그 빈자리가 낯설고 어색했다. 무언가 크게 부족하고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어서야 아버지는 돌아오셨다. 드디어 빈자리가 채워져 기분이 좋아졌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편치 않아 보였다. 친한 친구가 떠난 것이니 그 슬픔이 ..
[띵동] 시간이 충분했기에 여유롭게 초인종을 눌렀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띵동띵동] 몇 번이나 초인종을 눌렀지만 대꾸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집에 있을 텐데? 보통은 2, 3번만 초인종을 눌러도 나올 텐데…… 불안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밖에 서 있어도 되는 걸까? 지금이라도 뭔가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손바닥에 땀이 차고 호흡이 불안정해질 때쯤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거기서 뭐 해요?” “응?” 아내였다. 아내가 옆집에서 문을 열고 나와서 황당하다는 듯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니, 여기……” “바보 같기는… 그 집이 아니잖아요.”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이 집에 들어온 후 주변 집들을 하나씩 방문 중이다. 그리고 어제는 옆집에도 방문했었다. 민..
흙냄새가 났다. 술에 취한 탓에 착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아직 잠이 덜 깨서 꿈속을 헤매는 건지 몰라도 어릴 때 맡던 그 냄새가 났다. 시골 사는 사람에게 흙냄새는 공기의 냄새와 다르지 않다. 새벽같이 밖으로 나서면 눅눅하게 물기를 먹은 흙냄새가 코 끝을 스치고, 밭이든 논이든 가기만 하면 풀 냄새 섞인 흙냄새가 다가온다. 한발 내딛으면 흙이고, 물러서도 흙이니 오히려 흙냄새를 잘 몰랐다. 흙냄새가 그렇게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서울에 온 후였다. 정확히는 서울 생활을 하다 다시 시골을 갔을 때였다. 그전까지는 몰랐던 흙냄새가 아주 강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 냄새가 슬며시 코를 간질였다. 지금은 날 리 없는 그런 냄새였다. 아마도 꿈속에서 시골이라도 다녀온 걸까 싶었다. “어? 일어났냐?” 함께 ..
전 세계에서 단 사람에게 한 가지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모두가 자신의 소원을 빌기 위해 아우성칠 거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누군가 다치거나, 심하면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되고 보니 생각보다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사람들은 다들 자신의 소원을 빌고 싶었지만 그 욕심만큼이나 서로를 겨눈 무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세계 정상들이 회의를 하고 또 한 끝에 소원을 빌 수 있는 권한을 만 10세 이하 아이 중에 추첨하여 주기로 했다. 아직 어린아이들이 비는 소원은 그나마 어른들의 욕망에 비해 안전할 거라는 판단이었다. 물론 만 10세의 기준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대해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그 역시 어렵지 않게 타협했다. 각자의 출생신고일을 기준으로 삼고..
기억이 확실하지 않아.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해. 그럭저럭 몸을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공간이었지. 다른 특징으로는…… 사방이 온통 붉은색이었어. 좁고, 온통 붉기만 한 공간은 오래 머물기에 쾌적한 곳은 아니지. 왜 갇혀 있는지도 모르고 누가 오지도 않는 상태에서 가만히 있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러니 별 수 있어? 탈출해야지. 그나마 팔다리 움직일 정도 공간은 있어서 손에 잡히는 대로 잡아당겼어. 손톱으로 긁어도 보고, 하다 안 돼서 물어뜯기도 했지. 그나마 물어뜯는게 정답이었는지 조금씩 틈이 생기더라. 틈으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고 쥐어뜯고 또 물고…… 겨우겨우 탈출했단 말이야. 그랬더니 밖에 사람이 잔뜩 있는 거야! 너무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