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루불라의 정체가 정확히 무엇이라고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그것은 요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의지가 없고, 현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저 자연 현상이라고 넘기기에는 괴이로써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이것이 의지를 가진 요괴인지 아니면 그저 기이한 현상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요괴는 인간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얻기 때문에 인간 근처에 머문다. 하지만 부루불라는 인간이 있든 없는 발생한 자리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때문에 부루불라를 단순히 현상이라고 하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부루불라가 발생하는 원리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날카로운 것에 긁힌 벽에 흠집이 남듯이 공기에 생긴 상처 같은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드물게 주변의 소리와 공기가 뭉쳐지는 장소가 만들어지고, 여기..
여기는 또 어딜까? 처음 보지만 이상하게 익숙한 천장을 보는 게 몇 번 째일까. 그 이전에 난 누구일까?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이 뿌옇지만 곧 괜찮아질 거다. 이번에는 누가 된 것인지도 조금씩 생각날 거다. 어제까지는 50대 아줌마였다. 한 달 정도 전에 변해서 나름 열심히 살았다. 두 아이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보험 일도 열심히 했고, 둘째의 생일을 챙겨준다고 일찍 집에 들어가다가...... 거기서 기억이 끊겼다. 어떻게 된 걸까. 생각해 보면 계속 이런 식이었다. 새로운 기억과 몸에 적응하여 충실히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다른 몸이다. 그 전에는 입시를 준비 중이던 10대 학생이었다. 엄마는 괜찮을까? 아빠도 걱정을 많이 할 텐데...... 또 그전에는 30대 회사원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기다리고 있..
1. "왜 맨날 말썽이니!"라며 여자는 난처한 표정으로 소리 지르는 아이를 마트에서 끌고 나갔다. 마트 안쪽으로 들어갔을 때 "얘가 어디 갔지?"라는 말을 들은 거 같은데...... 2. 사람들은 이런 괴담을 읽는 것을 좋아하더라구요. 난 지금 당신이 이 괴담을 읽고 있는 것을 보는 걸 좋아해요. 3. 수술 전에 마취를 하면서 긴장을 풀기 위해 "처음이니까, 잘 부탁해요."라고 농담을 건넸다. 외과의는 긴장한 표정으로 "저도 처음이에요."라고 대답했다. 4. 3시간 만에 숲에서 잃어버린 여자 친구를 찾았습니다. 어떻게 쇠사슬을 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케이블 타이를 써봐야겠습니다. 5. 한 달간의 해외여행이라니 너무 기쁩니다! 왜 여행 가이드와 내가 부모님과는 다른 비행기로 여행을 가는 건지 궁금해..
슬슬 여름이 찾아오는 시기가 되었다. 점점 높아지는 기온과 습도가 조금 쉽게 짜증 나게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기분을 안 좋게 하는 것은 곰팡이였다. "아, 이건 못 쓰겠네." 아동용 이불이 완전히 망가졌다. 동물들이 웃고 있어야 하는 자리는 시퍼렇게 물들었고, 어떤 게 사자고, 여우인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M씨는 세탁기에서 꺼낸 이불을 집어던지며 한숨을 쉬었다. 혹시 살릴 수 있을까 해서 세탁기를 돌려보았지만 괴상하게 뭉개진 동물들의 웃음만 확인했을 뿐이다. 이 이불은 M씨의 아들이 좋아하는 애착 이불이었다. 겨울에 창고로 보낼 때도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였다. 이제 아주 망가져 버렸으니 얼마나 난리를 칠지 걱정이 앞섰다. 안 그래도 얼마 전부터 이불을 언제 꺼내냐고 매일 물어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이불..
1. 딸은 "내 머리색이 저랬으면 좋겠어요!"라며 한 여자를 가리켰다. 딸에게 슬슬 새로운 가발이 필요할 것 같아 그 여자를 잘 기억해두고, 칼을 갈았다. 2. 술집에서 한 여자를 만났고, 금방 친해졌다. 우리는 함께 술집을 나와 내 집으로 향했는데 골목을 지날 때 여자가 쓰레기통을 가리키며 "이 안에 내 몸이 숨겨져 있어."라고 했다. 3. 요즘 머리가 많이 빠지는 것 같아 고민이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카메라를 설치해보니 그 머리카락이 아니었습니다. 4. [대피소 밖 방사능에 노출된 상태에서는 3시간, 물 없이는 3일, 음식 없이는 3주간 생존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대피소에는 충분한 물이 있었지만, 2주가 지나도록 구조대가 안 오자 생존자들은 서로를 불안하게 바라보았습니다. 5. 버려진 뱀가죽이..
잠숨삼이는 잠자리 아래에 산다. 침대 아래나 이불 아래, 베게 아래 등 눈에 띄지 않고, 어두운 곳에 산다. 몸의 반만 현실에 걸쳐 있어 기척이 별로 없지만 실수로 움직이는 소리를 내기도 한다. 간혹 잠들기 전에 무언가 아래에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 있다면 잠숨삼이일 지도 모른다. 크기는 보통 한 뼘 정도인데 작아질 때는 손가락 한 마디까지 작아지고, 몸을 부풀리면 방 하나를 뒤덮을 정도로 커진다. 밤공기를 뭉쳐 몸으로 삼았기 때문에 몸이 검은빛을 띄는데, 작아지면 색이 진해지고, 커지면 흐려진다. 이녀석은 사람에게 딱히 해가 되지 않는 편이다. 다만 하품과 잠꼬대를 먹고살기 때문에 자꾸 사람을 잠들게 한다. 때문에 자고 싶지도 않은데 너무 졸려 힘들게 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 손에는 작은 막대기를 들고..
나는 감각을 모릅니다. 잊은 지 너무도 오래되었습니다. 듣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본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냄새가 무엇입니까? 맛이 무엇입니까? 내 몸이 있기는 있습니까? 아무것도 못 느끼는 채 생각만 부여하던 가련한 영혼을 향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메세지가 닿았다. 그것은 보인 것도 아니고, 들린 것도 아니다. 그저 전해졌고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생존과 활동은 확인되나 유의미한 자극 생성 및 전송은 실패. 이에 따라 프로젝트 '통 속의 뇌'는 폐기.]
1. 불길에 휩싸인 남편을 보면서 오직 이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누가 내 저녁을 망친 거지?' 2. 그가 나를 여자친구라고 소개했을 때 기절할 뻔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나를 죄수라고 불렀습니다. 3. 딸아이가 나보다 전처와 살고 싶다고 했을 때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팠습니다. 4. 사고를 당한 운전자의 가슴에 박힌 파편을 제거하기 위해 두 명의 외과의가 수술을 시작했다. 잠시 후 그들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장기가 다 어디 갔지?"라고 말했습니다. 5. 얼마 전에 동생이 사라진 후 동네 인형가게에 동생과 꼭 닮은 인형이 나타났습니다. 부모님과 나는 드디어 대학 등록금이 생겨서 기뻤습니다.
1. 목매단 딸을 발견했다. 또. 2. 소년은 "제 암이 사라졌으면 좋겠어요."라고 소원을 빌었다. 천사는 "미안하지만 다른 사람의 소원을 취소시킬 수는 없어."라고 대답했다. 3. 남편이 나에게 잠꼬대가 심하다고 합니다. 난 지금까지 남편이 잠꼬대를 하는 줄 알았는데...... 4. 나는 정신병으로 발작을 일으켜 가족들을 죽였고, 그 때문에 정신병원에 갇혔습니다. 이제 치료가 끝나고 나왔으니 홀로 남은 여동생을 찾아가 마무리를 지어야겠습니다. 5. 그녀의 한 마디가 그의 심장을 울렸습니다. "맛있어."라고 그녀는 계속 씹으며 말했습니다.
서울 모 지역에서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아니 연쇄살인은 아니다. 사건은 모두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이루어졌으니까. 경찰이 처음 현장에 들어선 것은 사건 당일이 아니라 며칠 후였다. 한 건물에 있던 사람이 모두가 죽었기에, 정확히는 자폐증 소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기에 신고가 늦었다. 정기적으로 이 복지센터를 방문하던 자원봉사자가 아니었다면 그 남은 소년 역시 굶어죽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죽었다는 신고에 출동한 경찰이 본 것은 잔인하고 처참한 살인의 현장이었다. 온갖 방법으로 살해당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다. 단, 하나도 멀쩡한 시신이 없었고, 그 살해 과정이 겹치는 경우도 없었다. 피해자는 총 12명. 복지센터의 센터장과 상주상 담사, 행정실 직원, 센터에서 보호받던 사람 9..
세상 모든 상처가 아픔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작은 상처가 끔찍하게 아프기도 하지만, 너무 큰 상처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아프지 않기도 한다. 상처 위에 상처가 더해지면 두 배는 아플 것 같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떨 때는 3배, 4배의 아픔이 찾아오지만, 어떨 때는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 어쩌면 상처마저 죽어버려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응, 아마 그럴 거다. 나는 이 사실을 아주 어릴 때 배웠다. 얇은 회초리로 맞은 게 몽둥이보다 아플 수 있다는 것도 배웠고, 주먹에 맞은 것보다 맞아서 넘어질 때 긁힌 자국이 더 아플 수도 있다. 같은 곳을 몇 번이나 맞다 보면 오히려 아프지 않기도 했다. 대신 조금 어지럽기는 했지만. 그리고 내 동생. 이 아이는 아주 작은 상처도 끔찍하게 아파했다. 저..
어이구, 뭐 하는 거니? 밥 먹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갔어? 계속 그렇게 드러누워만 있을 거야? 하여간 뭐 하나 재깍재깍 하는 게 없구나. 뭘 그렇게 쳐다봐? 그렇게 마음에 안 드니? 그렇게 싫어?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동안 엄마가 얼마나 열심히 키워줬니? 먹이고, 재우고, 너 하고 싶다는 거 어지간한 건 다 해주고...... 이제 엄마도 좀 누리면서 살고 싶다. 솔직히 엄마가 그 정도 자격은 있지 않니? 그러니까 그만 좀 귀찮게 하게 얼른 가려무나. 지 아빠도 그렇게 속 썩이고 느그적거리더니...... 아주 지 아빠랑 똑같아요. ...... 뭐해? 얼른 뒤지지 않고.
J는 살짝 밀려드는 한기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안 그래도 요즘 잠을 잘 못 자는데 이렇게 깨버리니 오늘은 잠들기 틀렸나 보다 싶었다. "아..." 피곤 탓인지 방이 건조한 탓인지 목이 바짝 말라 갈라지 목소리가 났다. 밀려오는 갈증에 J는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향했다. 방에서 나와 생수 하나를 꺼내 컵이 따르고 있으려니 어질러진 거실이 눈에 들어온다. 아직 엄마는 들어오지 않은 걸까. 그러고 보니 오늘 야근이라고 했던 것도 같다. 엄마와 단둘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모습이 갑자기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몇 년 전에 언니가 집을 나가고, 그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부모님이 이혼했다. 언니가 사라진 후에도 그랬지만 아빠가 나가 버린 이후로는 집이 너무 넓은 느낌이라 무서웠다. 하지만 두 분은 언니가 없어..
어느 날인가 이사 차가 아파트 앞에 와있었다. 사다리가 걸린 집이 어딘가 보니 내 옆집이다. 드디어 사람이 들어오는 건가? 그동안 빈집이라 조용하고 좋았는데. 시끄러운 집이면 어쩌지? 일주일이 지났다. 안 좋은 예감은 왜 틀리지를 않는 걸까. 어제부터 옆집에서 조금씩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이는 톡톡 노크하는 듯한 소리. 그 후에는 쿵쿵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이제는 득득 긁는 소리. 하루 종일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들리는 소리들이 나를 괴롭혔다. 도대체 뭘 하길래 이런 소리가 나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가구 배치가 아직 안 끝났나 보다 하고 넘겼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계속 들려오는 소음은 도저히 그냥 참아 줄 수 없었다. "저기요! 조용히 좀 합시다!" 결국 벽을 두..
어릴 적, 동생이 너무 시끄럽게 울어서 죽이고 그 시체는 우물에 버렸다. 다음 날 가보니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5년 후, 친구와 사소한 다툼 끝에 죽여버리고 말았다. 우물에 버리고, 다음 날 가보니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10년 후, 술김에 임신 시킨 여자를 죽였다. 우물에 버리고, 다음 날 가보니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15년 후, 마음에 안 드는 상사를 죽였다. 우물에 버리고, 다음 날 가보니 시체는 사라져 있었다. 20년 후, 병들고 늙은 어머니가 너무 귀찮아져서 죽였다. 우물에 버리고, 다음 날 가보니 시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시체는 사라지지 않았다.